[레전드의 인생 후반전] 인생 2막도 야구로 가득…윤길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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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의 인생 후반전] 인생 2막도 야구로 가득…윤길현 “행복합니다”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정말 행복합니다. ”

불펜에서부터 마운드까지의 거리. 인생의 절반 이상,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숱하게 오고갔던 길이다. 너무 익숙했던 탓일까. 선수 시절엔 미처 몰랐다. 팬들의 함성소리를 받으며 그 길을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윤길현 여자대표팀 투수코치는 “투수가 천천히 마운드에 올라 포수를 바라보지 않나. 그때의 느낌이란 게 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데, 그것은 정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면서 “투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묘한 긴장감이기도 하다. 그걸 느끼는 순간, 20대로 돌아간 것 같더라”고 말했다.

현역 유니폼을 벗은 지 약 6년이 지났다. 잠깐 쉼표를 그리는 듯했던 그의 야구 페이지는 또다시 빼곡하게 채워지고 있다. 일주일 내내 야구와 함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일엔 보통 아카데미에서 어린 엘리트 선수들을 가르친다. 주말엔 여자 대표팀 투수 코치로 뛰며, 월요일엔 야구를 주제로 한 예능프로그램 최강야구를 촬영한다. 은퇴 직후엔 지인과 다른 일을 배우기도 했다. 윤 코치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라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야구는 당분간 잊어야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그립더라”고 끄덕였다.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 투수는 ‘내 운명’

윤 코치가 야구공을 잡은 계기가 굉장히 단순하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다. 반 대항 대회를 열었는데, 윤 코치의 반이 우승했다. 윤 코치의 지분이 적지 않았을 터.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야구부 감독님이 불렀다. “너, 야구해라.” 그렇게 시작됐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선수들이 그러하듯 윤 코치 역시 고등학교 때까지 투수와 내야수를 겸업했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역시 투수였다. 윤 코치는 “일단 성적이 좋았다. 그러다보니 감독님께서 계속 찾으셨다. 약간은 운명처럼 ‘나는 투수를 하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고 미소를 지었다.

일찌감치 큰 주목을 받았다. 높은 지명 순번이 증명한다. 2002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전체 2순위)로 SK에 입단했다. 2015년까지 뛰며 왕조를 구축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이후 롯데와 자유계약(FA)을 맺으며 둥지를 옮겼다. 1군 통산 635경기서 800⅔이닝을 소화하며 44승41패 30세이브 111홀드를 마크했다. 특히 주 무기인 ‘슬라이더’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횡으로 예리하게 떨어지는 궤적에, 타자들 사이에선 ‘알고도 못 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윤 코치는 “고등학교 때 배운 구종”이라면서 “포수들이 정말 무지하게 사인을 냈다”고 웃었다.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 새로운 도전 ‘지도자’

지도자의 꿈은 이전부터 품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하나씩 펼쳐나가는 중이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았다. 윤 코치는 “선수 때는 아무래도 내 것에만 집중하지 않나. 지도자가 되고 난 뒤 바라보는 야구는 좀 다르더라”면서 “눈높이도 조금은 낮춰야 하고, 보다 좀 더 넓게 봐야 한다. 무엇보다 선수들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은 명확하다. “투수라고 하면 무조건 공격적으로 투구하라고 한다. ‘안타 맞는 거, 점수 주는 거 신경 쓰지 말자’ ‘볼넷으로 도망가지 말자’고 한다”고 전했다.

지난해부터는 여자야구 대표팀 코치직을 맡았다. 프로와 아마추어 야구가 다르듯, 여자야구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윤 코치는 “사실 여자야구에 대해 잘 몰랐다. 기사를 통해 (2023년 당시) 양상문 감독님, 정근우 코치가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조금씩 관심이 생기던 찰나였다”면서 “허일상 감독님께서 도와달라고 연락이 오셔서 바로 수락했다”고 밝혔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자야구는 여전히 열악하다. 대표팀 역시 처우가 좋은 편이 아니다. 윤 코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보수 등은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가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새로운 도전, 걱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실제로 경험해보니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여자야구만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윤 코치는 “처음 왔을 때만 하더라도 야구를 모르고 하더라. 공 던지고 공 받는 수준이었다”고 운을 뗀 뒤 “지금은 기본적인 것은 물론, 생각하는 플레이가 나온다. 감독님께서 강조하시는 것들을 선수들이 잘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미국에서 여자프로야구가 (71년 만에) 부활하지 않았나. 한국 선수들(박주아, 김라경, 김현아)도 트라이 아웃에 통과한 것으로 아는데 더 발전할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 스포츠와 예능, 그 경계선에서

최강야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트라이아웃에 임하느니 모습만으로도 단숨에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 훈련에서부터 최고 구속 142㎞를 찍기도 했다. 윤 코치는 “한때 같이 야구했던 선수들이 나오더라. 옛 추억에 잠기면서 나 역시 야구가 하고 싶더라”고 말했다. 초심으로 돌아갔다. 윤 코치는 “처음 야구 시작할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아무래도 은퇴한 지 좀 됐다 보니 몸이 맘처럼 안 되더라. 트라이아웃 때는 준비를 거의 못하고 나갔다. 대표팀 코치도 하다 보니 좀 올라왔다. 배팅 볼 던져줄 때도 혼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고 전했다.

예능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쉽게 볼 순 없다. 나름 체계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다. 야구공만 들면 피어오르는 승부욕도 한 몫을 한다. 후배들이라고 봐줄 생각은 없다. 윤 코치는 “제작진 분들이 영상을 보여주신다. 후배들이 ‘깨부수겠다’ 다부진 각오를 전하는데, 자극이 되더라”고 웃었다. 부담도 많이 됐다. 윤 코치는 “선수 때 느꼈던 압박감 그대로”라면서 “투구 시 마지막에 확 끌어올리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 선수 때만큼은 트레이닝을 안 해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정말 즐겁다. 촬영 전날부터 ‘빨리 가고 싶다’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 계속되는 꿈 “언젠가는, 모교에서”

야구를 하면 할수록 옛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도 과거 몸담았던 SSG(전 SK), 롯데 등의 경기는 챙겨본다. 프로야구 이야기에 윤 코치는 “SSG도, 롯데도 참 특유의 매력이 있는 팀”이라며 잠시 회상에 잠긴 듯했다. “친정 팀인 SK 경우엔 SSG로 바뀌었을 때 약간의 공허한 마음이 들기도 하더라. 옛날에 내가 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롯데에 대한 기억도 무궁무진하다. “부산 사직구장에서 호투하고 내려왔을 때의 그 전율은 정말 잊을 수 없다. 그 심정을 알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더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 누구도 세월을 거스를 순 없다. 같이 야구하던 후배들이 어느새 어엿한 베테랑이 됐다. 윤 코치의 시선이 좀 더 애틋해졌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선수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부정적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서 “나 역시 그랬다. 스스로 충분히 했다고, 후회 없을 거라 믿었다. 아니더라. 선수 막바지에 고관절 부상 등으로 고생했는데, 미련이 많이 남더라. 야구가 정말 하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순 없겠지만, 최대한 몸 관리 잘하면서 할 수 있을 때 즐겼으면 한다”고 재차 언급했다.

오늘도 윤 코치는 꿈을 꾼다. 목표를 묻는 말에 윤 코치는 가장 먼저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마운드에 오르고 싶다”고 전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스스로 노력도 많이 해야 한다. 윤 코치는 “운 좋게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기회를 얻었지만, 50세, 60세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현재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고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언젠간 모교 지휘봉을 들고 싶은 바람도 있다. 차근차근 쌓아가는 지도자 경력도 이를 위한 발걸음 중 하나다. 윤 코치는 “프로 혹은 아마추어서 지도자 공부를 많이 해 모교서 야구를 펼치고 싶다”고 끄덕였다.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윤길현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 김용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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