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상컬럼] 테헤란의 '흥부'와 알라딘의 요술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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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상컬럼] 테헤란의 '흥부'와 알라딘의 요술램프
그래픽노브툭LM[그래픽=노브툭LM]
어릴 적 읽던 ‘알라딘의 요술 램프’가 유난히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문지르면 거인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던, ‘천일야화’ 속 마법의 세계 말이다. 상인과 모험가, 시장과 궁정이 뒤섞여 있던 그 이야기의 무대는 오래전 중동 문명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은 노력과 기지로 운명을 바꾸려 애썼다.
 
한때 교역과 문명의 요충지였던 이란의 현실을 떠올리면, 그 동화는 더욱 멀게 느껴진다.
이란 옛 왕정의 마지막 왕세자 레자 팔레비는 최근 “이란은 중동의 한국이 됐어야 했지만 지금은 북한이 됐다”고 말했다. 석유라는 ‘검은 황금’을 가진 나라가 북한에 비유되는 현실은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다.
 
이 장면을 보며 문득 우리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가 떠올랐다. 흥부는 게을러서 가난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관가에서 매품을 팔 만큼 성실했다. 지금 이란의 국민들도 다르지 않다. 테헤란의 거리에는 상인과 기술자, 젊은 창업가들이 여전히 많다. 무언가 해보려는 사람들의 의지는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까.
흔히 “이란에는 시장의 자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표현이다. 이란에는 시장이 있다. 개인 상점도 있고 중소기업도 있으며, 전통적인 바자르와 신생 스타트업도 존재한다. 문제는 시장의 존재가 아니라 접근이다. 흥부에게 논밭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릴 권한이 없었던 것과 닮아 있다.
 
과거 이란의 왕조는 화려했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장사할 판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는 못했다. 국가는 부유했으나 시장은 자유롭지 않았고, 기업은 성장의 주체라기보다 관리의 대상이었다. 그 뒤를 이은 신정 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의 핵심을 국가와 혁명 권력이 장악했다. 에너지와 건설, 금융과 물류 같은 분야는 민간이 넘보기 어려운 영역이 됐고, 기업가정신은 구조적으로 제약받았다.
 
이란 경제의 본질은 완전한 계획경제가 아니다. 시장은 있으되 공정한 경쟁과 예측 가능성이 부족한 ‘닫힌 시장’에 가깝다. 규제는 잦게 바뀌고, 권력과의 거리만큼 기업의 생존 가능성이 달라진다. 이런 환경에서 기업가정신이 자라기란 쉽지 않다.
 
경제의 기적은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는 종교의 영역이지만, 경제의 기적은 자유로운 시장과 제도에서 나온다. 왕의 명령이나 성직자의 교리로는 빵 한 조각도 부풀릴 수 없다.
 
이 점은 인공지능(AI) 시대에 더욱 분명해진다. AI는 중앙의 계획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민간의 실험과 실패, 작은 기업들의 도전이 축적될 때 기술은 진화한다. 데이터는 충성하지 않고, 알고리즘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누가 통치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시도할 수 있느냐에서 갈린다.
독일이 전후 폐허 속에서도 기업과 시장 질서를 복원해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대만이 정치적 제약 속에서도 중소기업을 키워 반도체 강국의 토대를 마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기업가정신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지가 성패를 갈랐다.
 
지금 이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왕도, 새로운 교리도 아니다. ‘천일야화’ 속 주인공이 램프를 문지를 수 있도록, 꽉 닫힌 동굴의 문을 여는 일이다. 그 주문은 마법의 언어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법과 제도,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시장이라는 현실의 언어일 것이다.
마법은 램프에 있지 않다.
 
램프를 문지를 수 있게 해주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 위에서 작동하는 기업가정신에 있다.

 
앙트레프레뉴어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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