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최근 제기된 ‘그린란드–관세’ 연계 구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덴마크와 유럽 7개국을 향해, 그린란드 문제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2월 1일부터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고, 6월 1일에는 이를 25%까지 인상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안보·영토·동맹이라는 전통적 외교 의제가 곧바로 관세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통상 위협을 넘어선다. 동맹도 예외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각인시킨 것이다.
이 발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중요한 사실은 국제질서의 작동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규칙과 예외’보다 협상력과 보복 능력에 의해 움직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동맹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 보호를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백악관은 반도체와 장비, 파생 제품을 무역확장법 232조(국가안보) 틀에서 관리하며, 관세 부과뿐 아니라 국가별로 별도의 합의를 체결하라는 방향을 공식화했다. 이는 ‘관세율 하나로 끝나는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각국은 투자, 공급망 재편, 규제 협력, 시장 접근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조건표를 제출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최근 미·대만 반도체 합의는 이를 잘 보여준다. 관세 조정과 대규모 대미 투자 약속이 결합된 이 방식은 곧바로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에 재협상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제 관건은 관세율의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전략적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가다.
이처럼 ‘관세의 외교화’가 빠르게 굳어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관세는 효과가 즉각적이며, 의회 입법 없이도 집행할 수 있다. 국내 정치적으로도 성과를 설명하기 쉽다. 실제로 AP-NORC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경제, 이민, 외교 전반에 대한 평가는 낮게 나타났는데, 이는 행정부가 더욱 가시적인 압박 수단을 선호할 유인을 제공한다. 그 결과 트럼프발 불확실성은 일시적 변수가 아니라 외교·경제·무역정책 전반에서 상수로 작동하고 있다.
이 환경에서 한국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한 번의 타결’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국가별 합의가 표준이 된 상황에서 경쟁국의 합의 내용은 곧 우리의 협상 조건을 다시 정의한다. 통상 협상은 단발 이벤트가 아니라 연속 게임이 됐다.
둘째, 2단계 리스크를 구조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특정 품목이 당장 제외됐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적용 범위가 언제, 어떤 조건에서 확대될 수 있는지다. 정부와 기업 모두 ‘현재의 관세’가 아니라 확대의 트리거를 읽고 대비해야 한다.
셋째, 협상력의 기반은 결국 내부 체력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관세는 외부에서 날아오지만, 충격을 흡수하고 조건을 바꾸는 힘은 국내에 있다. 전력 인프라, 인재, 연구개발(R&D), 규제 혁신, 공급망 다변화 같은 ‘관세 밖의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협상에서도 가격이 아니라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
트럼프 2년 차의 세계는 더 이상 ‘합의된 규범이 자동으로 지켜지는 세계’가 아니다. 협상력이 규칙을 밀어내는 세계다. 그렇다고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원칙은 더 단순해진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외교, 리스크를 분산하는 경제 전략, 내부 체력을 키우는 산업·사회 정책이다.
관세 전쟁은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게임 규칙이 굳어지는 과정이다. 트럼프 2년 차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불확실성을 탓하는 데서 멈추면 매번 흔들리지만, 불확실성을 상수로 놓고 설계에 나서면 최소한의 조건은 만들 수 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냉정한 현실 인식과 지속 가능한 전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상호관세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혜승 AJP 편집국장 ellenshs@a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