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실시된 지 10년, 브렉시트 협상이 타결된 지 5년이 되는 해다. 영국 언론들은 브렉시트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 그리고 향후 관계가 어디로 향할지를 짚어보는 기사들을 보도하고 있다. 브렉시트의 부작용과 문제점이 드러났고 브렉시트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 재논의나 유럽연합(EU) 단일시장 재가입 또는 관세동맹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올해 5월 영국 총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든 EU와의 관계 강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최근 집권당인 노동당 내부에서는 관세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각 분야별로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유연한 조정이 가능한 스위스식 모델이 부상하고 있다.
영국에선 EU 재가입 여론 높아
인디펜더스 등 외신에 따르면, 최근 여론조사에서 영국 유권자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유권자들보다 EU에 속하고 싶어 하는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6개 유럽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업체 ‘유고브(YouGov)’의 조사 결과, 지금 국민투표가 실시된다면 영국 유권자의 50%가 EU 회원국으로 남는 데 찬성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프랑스(45%)와 이탈리아(46%)보다 높은 수치다. 독일에서는 62%가 EU 가입을 지지했으며 덴마크는 75%, 스페인은 66%로 더 높았다.
또한 영국에서는 EU 밖에 머물고 싶다고 답한 비율이 31%에 그쳤다. 이는 약 10년 전 브렉시트에 찬성했던 52%(반대 48%)에 비해 크게 줄어든 수치다. 같은 질문에 대해 프랑스는 30%, 이탈리아는 28%, 독일은 20%, 덴마크는 14%, 스페인은 13%였다.
이코노미스트가 여론조사기관 ‘모어 인 커먼(More in Common)’에 최근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에서 응답자의 52%는 EU 탈퇴 결정이 잘못됐다고 답한 반면 옳았다고 본 비율은 32%에 그쳤다. 65세 이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령층에서 브렉시트에 부정적인 의견이 우세했다.
만약 지금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한다면, 47%가 EU 재가입에 투표하겠다고 답했고, 32%만이 현 상태 유지를 선호했다. 다수의 응답자는 브렉시트가 이민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늘렸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응답자의 55%는 미국과의 무역장벽이 다소 높아지더라도 EU와 더 긴밀한 무역 관계를 맺는 것을 지지했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의 42%는 브렉시트 자체는 잘 작동할 수도 있었지만 정치인들이 형편없이 처리했다고 답했다. 이같은 브렉시트에 대한 여론의 부정적 전환은 키어 스티머 총리에게 압박으로 작용할 전망이지만 스티머 총리는 여전히 EU 단일시장 재가입 불가, 관세동맹 불가,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 불가라는 노동당 공약의 ‘레드라인’을 완화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브렉시트는 영국 경제에 부정적 결과”
이코노미스트는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의 결함을 심화시켰고 강점을 무디게 했다(Brexit has deepened the British economy’s flaws and dulled its strengths)’, ‘영국은 EU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시점이다(It’s time to rethink Britain’s relationship with the EU)’ 등 기사를 통해,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것은 아니지만 "타이어의 바람이 서서히 빠지는 것(Slow Puncture)"처럼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손상을 입혔다고 진단했다.
우선 투자 정체다. 영국은 수십 년 동안 인프라와 연구·개발(R&D) 같은 분야에 대한 자본 지출에서 G7(주요 7개국)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는 생산성 부진의 주요 원인이다. 2011~2016년 사이에는 기업 투자가 연평균 6% 증가하며 잠시 침체에서 벗어나는 듯했지만,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이런 회복세는 끝났다. 이후 6년 동안 투자는 사실상 정체됐다. 팬데믹도 분명 영향을 미쳤지만, 두 건의 별도 추정치는 2022년 기준 기업 투자 부족분의 10%가 브렉시트만으로 설명된다는 분석이다. 장기간 이어진 불확실성이 투자자들을 주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이제 상당 부분 해소됐지만, 브렉시트의 여파는 여전히 남아 있다. 브렉시트는 영국 기업들 사이에 오래된 관행인 위험 회피와 단기 성과 추구 경향을 다시 강화시켜, 투자를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영역은 제조업이다. 영국의 글로벌 제조업 수출 비중은 2000년부터 2022년 사이 절반 이상 감소했다. 높은 노동비용, 치열해진 해외 경쟁, 막대한 에너지 요금이 발목을 잡았다. 브렉시트 이전에는 5억명에 달하는 단일시장(EU) 접근권이 이런 단점을 상쇄해줬다. 그러나 그 이점이 사라지고 각종 비관세 장벽으로 대체되자, 상품 수출이 팬데믹 이전보다 거의 15% 감소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더 심각한 점은 이런 급감이 EU뿐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한 수출에서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EU로부터 들어오는 중간재의 비용 상승이 영국의 기존 약점을 더욱 키우면서, 제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한층 더 갉아먹었다.
세 번째로 브렉시트가 영국의 약점을 키웠을 뿐 아니라, 영국의 강점 하나를 둔화시켰다는 점이다. 영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서비스 수출국이다. 런던 금융중심지 시티의 은행가들, 창의적인 영화 제작자들, 수많은 컨설턴트들이 활발한 서비스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이 분야에서 영국은 브렉시트를 비교적 잘 견뎌낸 것처럼 보인다. 실질 기준으로 서비스 수출은 2019년 이후 약 25% 증가했다. 하지만 이는 주로 전 세계적인 호황 덕분이다. 보험사에 대한 새로운 인허가 요건이나 생물학자 국적 규정 등 EU와의 장벽이 생기지 않았다면, 영국은 확실히 더 나은 성과를 냈을 것이다. 지난해 6월에 발표된 한 연구는 브렉시트로 인해 서비스 수출이 4~5% 감소했다고 추정했다.
영국-EU, 협력 강화하기로 합의했지만…영국과 EU는 브렉시트 5년여만인 지난해 5월 국방과 에너지, 무역 전반의 협력을 강화하는 관계 재설정에 합의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안보가 위협받고, 동맹과의 전통적인 협력을 거부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돌아오면서 영국과 EU도 빠르게 밀착한 결과다. EU는 대출 형태로 무기 공동구매 자금을 지원하는 1500억유로(약 240조원) 규모의 ‘유럽방위기금(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을 신설할 계획인데, 영국 방위산업체들도 여기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또 경제와 무역 부문에선 영국이 EU에 북해 조업권을 양보하는 대신 EU에 수출할 농산물과 식품에 대한 안전 검사 인증 절차를 대폭 완화 받기로 했다. 영국은 EU 교환학생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참여를 약속했지만, 특정한 청년 교류 계획을 협정에 담진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프랑스의 강한 반대로 영국 방산 기업들이 EU의 ‘SAFE’ 기금에서 더 큰 역할을 하려던 협상은 자금 문제로 결렬됐다. 식품 기준 협정을 포함한 다른 영국-EU 관계 협상들도, 스타머 총리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과 정상회담을 가진 지 무려 6개월이 지난 뒤에야 EU 측의 권한 부여 지연으로 인해 지난 달에야 시작됐다. 청년 이동성 협상에서도 양측의 입장 차는 여전히 크다. 대학 분야에서는 영국이 2027년부터 학생 교류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에 재가입하기로 합의했으며, 더 낮아진 연간 부담금은 약 5억7000만파운드(약 7억6300만달러)다. 그러나 EU 학생들이 다른 외국인들과 같이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현실적인 장애물과 30%대 브렉시트 지지층
영국에서 EU 재가입 여론이 높아지면서 집권 노동당 내부에서도 관세동맹 가입 목소리가 일부 나오고 있다. 노동당의 차기 지도자로 평가 받는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은 지난달 ‘옵서버’와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공식 노선에서 벗어나 EU와의 “더 깊은 무역 관계”를 촉구했다. 스트리팅은 유럽과의 관세동맹 가입이 다음 총선(올해 5월로 예정된 잉글랜드 지방선거, 구성국 웨일스 총선, 스코틀랜드 총선)에서 극우인 나이절 패라지 개혁당 대표에 맞서기 위한 노동당만의 차별화된 메시지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스트리팅에 앞서 데이비드 래미 부총리 역시 유럽과의 관세동맹 재가입이 바람직하며, 터키와 같은 국가에는 도움이 됐다고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 상태, 즉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여론이 30% 수준이다. 또 지난해 EU와의 협력 강화 합의에도 불구하고 후속 협상이 지지부진한 데서 보듯이, EU와 협상하는 것 자체의 어려움과 EU가 양보의 대가로 요구하는 높은 비용이라는 현실적 장애물이 있다.
올해 여름 또 한 차례 EU-영국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이 회의가 무역 의제에 새로운 제안을 더할지는 불확실하다. 과거 EU는 EU 규칙 준수, 예산 분담, 사람의 자유 이동이라는 의무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단일시장의 이익만 취하려는 이른바 ‘체리피킹’을 거부해 왔다.
지난해 5월의 영국과 EU의 합의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돈’ 문제도 있다. EU는 이제 영국에 ‘참여하려면 비용을 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유럽방위기금(SAFE)에 영국이 참여하려는 시도가 무산된 것도 재정 분담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프랑스 주도로 제기된 최대 60억유로(약 70억달러) 부담 요구는 영국 상원 유럽위원회 위원장인 리케츠 경으로부터 “터무니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은 20억유로로 낮춘 요구안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런던의 싱크탱크 ‘유럽개혁센터(CER)’의 찰스 그랜트는 프랑스가 SAFE에서 영국을 배제하고 싶어 한다고 본다. 지난해 5월 EU와의 협상팀을 이끌었던 닉 토머스-시먼즈 내각부 장관은 자신을 “가차 없이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비용이 지나치게 크다면 어떤 합의에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분야별로’ ‘유연한’ 스위스식 모델 부상
‘옵서버’의 보도에 따르면, 한때는 주변부 인사들의 주장으로 치부됐던 영국의 관세동맹 재가입 구상이 이제는 데이비드 래미 부총리, 차기 당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웨스 스트리팅, 그리고 총리의 경제 고문인 미누슈 샤피크의 입을 통해 공개적으로 언급되면서 총리실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관세동맹은 여전히 선택지에서 제외돼 있지만, 영국에 EU 단일시장 일부 접근권을 부여하는 스위스식 ‘동적 정렬(dynamic alignment)’ 협정 제안이 스타머 총리의 측근들 사이에서 점차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식 동적 정렬 협정은 무역 협정에서 상품·서비스·지식재산권 등 각 분야별로 정해진 기준에 따라, 협정 당사국 간 자유무역과 시장 접근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이다. ▲각 분야별로 정해진 일정에 따라 관세 인하, 시장 개방, 규제 완화 등을 단계적으로 진행 ▲각 분야별 국제 표준이나 기준에 따른 협상 ▲경제 환경 변화나 기술 발전에 따라 협정내용을 유연하게 조정 등이 주요 내용이다.
스위스식 동적 정렬 협정을 촉구하는, 영향력 있는 친유럽 단체 ‘노동운동을 위한 유럽(Labour Movement for Europe)’의 정책 문건 역시 점점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문건은 스위스가 “간단히 말해 산업재, 농식품, 전력, 항공 및 육상 운송 등 특정 분야에서 단일시장 접근권을 유지하고 연구혁신(R&I) 프로그램 호라이즌(Horizon), 에라스무스+, 위성항법시스템 갈릴레오(Galileo), 위성위치추적시스템 에그노스(Egnos) 등 EU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협정을 맺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 대가도 있다. 문건은 “이 같은 체제의 일환으로 스위스는 자유 이동을 수용하고,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피해가 발생한다고 판단될 경우 발동할 수 있는 ‘세이프가드(safeguard) 브레이크’를 두며, EU에 재정적 분담금도 납부한다”고 덧붙였다.
정재형 세종중부취재본부장·경제정책 스페셜리스트 jj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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