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삶이 급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본질적 가치들. 예술은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험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더욱 면밀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의도’와 ‘목적’이기 때문이다.
‘백남준:커뮤니케이터’(뉴욕한국문화원, 2025) 전시 전경. 현대차 정몽구 재단 제공 ◆20세기 칭기즈칸 백남준(1937∼2006)은 당대 최신 기술을 예술의 언어로 활용하며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고 길을 제시한 혁명적 예술가였다. 그가 창시한 ‘비디오아트’는 기존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1974년에 초연결 시대를 예견하며 주창한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의 개념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기술이 인간을 위협하거나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해방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작품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불안과 설렘이 교차하던 디지털 시대의 도래 앞에서, 그는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광복 80주년 기념으로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열리고 있는 ‘백남준: 커뮤니케이터’(9월26일∼11월22일)는 백남준의 이러한 범지구적 의의를 세계적 맥락에서 재고하는 전시다. 백남준아트센터와 뉴욕한국문화원, 현대차 정몽구 재단이 공동 주최·주관한 이번 전시에는 주요 작품 25점이 소개된다. 그리고 백남준이 전한 ‘불멸의 메시지’가 동시대 예술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조명하기 위해 현대차 정몽구 재단의 ‘ONSO 아티스트 공모전’ 대상 수상자인 김아름(b. 1987)의 신작도 함께 선보인다.
시대를 초월한 두 작가의 만남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 출품되어 백남준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긴 ‘칭기즈칸의 복권’에서 시작된다. 말 대신 자전거를 타고 TV 케이스를 잔뜩 싣고 달리는 ‘20세기 칭기즈칸’은 동서양을 잇는 통로가 실크로드에서 전자 초고속도로로 대체되었음을 알린다. 그는 이미 1962년,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외치며, 유럽 중심의 문화 권력에 균열을 내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이는 서양 절대왕정의 상징인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를 비틀어, 자신을 문화적 침입자이자 해방자로 정의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복’은 폭력이 아닌 문화를 통한 소통이었다. ‘칭기즈칸이 다시 돌아온 세상’은 기술을 통해 전 세계가 평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평화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새로운 질서의 도래였다.
◆사랑의 미래
김아름의 신작 ‘미래로 가는 자동차’는 ‘칭기즈칸의 복권’에서 영감을 받아, 인류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질문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기술의 상징인 자동차를 타고 물 위를 달린다. 이들은 김아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존재들로, 작가 자신의 자아와 키우던 반려견을 상징한다. 인간과 비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이 동반자들은 문명의 상징인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관문을 지나, 마침내 사랑의 다양한 모양들로 이루어진 추상적 풍경에 도달한다.
김아름, ‘사랑의 물방울들’(2023). 작가 제공 두 주인공이 자동차를 타고 사랑의 세계에 이르렀듯, 김아름에게 기술은 사랑을 향한 매개다. 그는 기술 과학 시대에 우리가 향해야 할 종착점은 사랑이고, 기술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화면 속에는 연애편지부터 휴대전화 속 사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하트 아이콘까지 시대에 따라 변주된 사랑의 징표들이 등장한다. 모습을 달리했을 뿐, 사랑은 언제나 인간의 근원으로 존재해 왔다. 작가는 사랑이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이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주인공들이 향한 ‘사랑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지나왔고 겪고 있으며 계속해서 마주하게 될 내면의 세계이다.
◆영원의 물방울
주인공들을 태운 자동차가 땅이 아니라 물 위를 달린다는 점은 김아름의 작업에서 물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영상뿐 아니라 회화, 드로잉,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데, 비가시적 세계를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종종 물의 형상과 물성을 활용한다. 평면에서는 수채화를 주 매체로 사용하는 그는 물감이 종이에 스며들어 형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칭한다. 그에게 작품을 만드는 물리적 행위에는 정신적 함의가 담겨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물을 인간의 상상과 내면 세계를 열어주는 매개이자 시적 사유의 근원으로 보았던 것처럼, 김아름은 물에서 사랑과 영원을 상상한다. 고정된 형태 없이 흐르고 씻어내는 물은 그의 작품 속에서 내면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사랑의 물줄기가 된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바다는 사랑의 심연이 되고,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어 안는다. 물은 이처럼 순간과 영원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을 동시에 드러내며, 김아름의 예술세계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빚어진다. 가볍고 투명하지만 어딘가 근엄해 보이는 물방울 요정으로, 혹은 텅 빈 종이에 스며들어 영원을 담아내는 공간으로 피어난다.
김아름, ‘물방울 요정들’(2023). 작가 제공 ◆안개가 걷힌 길을 따라 구름이 물방울이 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다시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구름으로 돌아가듯, 변치 않는 세상의 원리는 백남준과 김아름의 예술 세계를 하나로 엮어낸다. 두 작가는 차가운 기술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옷을 입히고, 기술을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칭기즈칸이 복권한 그 자리는 사실 김아름의 주인공들이 향하던 미래이기도 하다.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과거가 되는 순간, 시간은 선형적 흐름을 벗어난 새로운 장이 된다.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와 김아름의 물길은, 따라서 하나로 연결된 길이다. 사랑으로 흐르는 이 길 위에서 두 작가는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백남준과 김아름의 자아가 투영된 주인공들은 기술을 등에 업거나 그 위에 탑승한 채, 확신을 가지고 달려 나간다. 인터넷의 보급과 인공지능의 보편화라는 서로 다른 시대의 길목에 서 있지만, 이들에게는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천진하지만 확고하며, 고요하고도 장엄한 이들은 침묵의 확신으로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한다. 안개가 걷힌 길을 따라, 투명하게 반짝이는 사랑의 미래 속으로.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