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미국 웨스팅하우스(WEC)가 맺은 원전 수출 협정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한전과 한수원은 당시 웨스팅하우스와 특허 분쟁을 종료하며 협력 관계를 복원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국정감사 등을 통해 한전,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에 막대한 기술사용료와 역무(일감) 제공, 신용장 발행, 시장 양보 등을 약속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불공정 계약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여당에서는 이를 두고 '매국 계약''불공정 계약'이라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반면 계약 당사자들은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정타 날린 美 에너지부당초 우리나라는 원전 기술 자립을 주장해왔다. 체코 두코바니에 수출하는 APR1000 노형은 독자 개발한 것으로 웨스팅하우스의 기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1월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비밀 협정에서 한전, 한수원은 원전 1기당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원)의 기술료를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와 별도로 원전 1기당 6억5000만 달러(약 9200억원)어치의 물품 용역 계약을 웨스팅하우스에 보장하기로 했다. 원전 하나를 지을 때마다 1조원 이상이 웨스팅하우스로 흘러가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에 대비해 은행의 지급을 보장하는 보증 신용장을 원자로 1기당 4억달러 규모로 발행하도록 했다. 이 조항은 계약 체결 뒤 10년간 유지된다.
양측은 협정서 부록에서 양국이 진출할 수 있는 시장도 명시했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와 체코를 제외한 유럽연합(EU),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 등에서는 향후 웨스팅하우스만 원전을 수주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원전을 수출할 수 있는 곳은 중동,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로 제한했다. 이 협정은 50년간 유지되며 쌍방이 종료하기로 합의하지 않는 한 5년씩 자동 연장된다. 이를 '노예 계약'이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그동안 '독자 기술'을 강조하던 한국이 갑자기 웨스팅하우스에 대폭 양보한 것은 지난해 8월 미국 에너지부(DOE)의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한수원과 한전의 설명이다.
한수원이 최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비공개로 설명한 내용에 따르면 2024년 8월 7일 미국 워싱턴D.C. 미 에너지부에선 에너지부, 산업통상자원부, 한수원, 한전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형 원전에 대한 미국 기업 기술의 포함 여부 판정'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미 에너지부 산하 아르곤국립연구소는 이날 한국형 원전에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아르곤국립연구소는 한국형 원전의 설계도를 입수해 비교 분석한 결과 이같은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체코에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선 미국의 수출 통제를 받아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 아르곤국립연구소의 판단은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후 한국은 웨스팅하우스의 다양한 요구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한수원과 한전의 설명이다.
양측이 작성한 합의서 전문에도 "한국형 원전은 웨스팅하우스 기술을 활용해 개발한 것"이라고 명시됐다. 우리나라는 해외에 원전을 수출할 때는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을 통해 미국 수출 통제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또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차세대 원전을 수출할 때도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기술 자립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허성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국 에너지부와 아르곤국립연구소의 판단 경위 등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으나 한수원 등은 제출하지 않았다.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은 "해당 판정이 체코 원전 수주를 둘러싼 분쟁에서 갑자기 '영구 노예계약'으로 급선회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이런 판정이 왜, 어떻게 진행됐는지 전후 과정을 따져볼 필요가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르곤국립연구소 판단 하나에 순순히 우리나라가 협상에서 물러났다고 보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원전 수출과 관련해 우리나라는 그동안 미국 측과 크게 2차례의 협정을 체결했다.
1997년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을 인수한 ABB-CE와 기술 사용 협정을 체결했다. 2009년에 아랍에미리트(UAE)에 APR1400 노형을 수출할 때는 다시 ABB-CE를 인수한 웨스팅하우스와 협약을 체결했다. 두 건의 계약에도 기술사용료 및 수출 시 일감 제공 등의 조건이 포함됐지만 시장 진출을 제한하거나 사실상 영구적인 계약 조건은 포함하지 않았다.
한전·한수원 "체코 수주 위해 불가피했다"미국 에너지부의 브리핑이 있었던 2024년 8월 7일은 우리나라가 체코의 원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7월 17일에서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리나라는 체코와 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분쟁을 하루빨리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2024년 9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체코를 방문했다.
전대욱 한수원 사장 직무대행은 지난 20일 국회 산자위 국정감사에서 "계약 내용상 부족한 면이 많았다"고 인정하면서도 "체코 수출을 위한 선택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도 공동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미국 시장 진출 가능성 등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동섭 한전 사장도 "1997년 협정에 비해 표면적으로 불리하게 체결된 것처럼 보인 측면이 있다"면서도 "웨스팅하우스와의 법적 장애물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한수원과 한전에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정을 파기할 경우 당장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출 계약은 없던 일이 될 수 있다. 웨스팅하우스가 재협상에 나설지도 미지수다. 허성무 의원은 "웨스팅하우스에 무효 소송을 제기하게 되면 체코를 포함한 수출은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다"며 "지금 외통수에 걸려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희종 에너지 스페셜리스트 mindl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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