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다. 이미 인간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다. 계산과 기억, 번역과 요약, 판단과 추천의 영역에서 기계는 인간을 능가하거나 대체하고 있으며, 인간은 점점 더 빠르고 효율적인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기술이 전진할수록 한 가지 질문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의 『인공지능 시대 철학의 쓸모』는 바로 이 지점에서 걸음을 멈춘다. 기술의 속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사유를 되돌리며, 인간과 문명의 좌표를 다시 묻는다.
이 책은 “철학은 과연 쓸모가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는 곧 그 질문 자체가 잘못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기상 교수에게 철학은 기술 발전을 꾸며주는 장식물도, 윤리 규범을 보완하는 부속 장치도 아니다. 철학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사유의 중심이며, 인공지능 시대에 그 쓸모는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기술의 위기는 기술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무너지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오늘날 인간이 점점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처리되는 객체’, ‘추천받는 존재’로 바뀌고 있음을 지적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예측하고, 시스템은 선택을 대신 제안하며, 우리는 그 결과를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 대가로 인간은 편리함을 얻지만, 질문하는 능력과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서서히 내어준다.
이기상 교수는 이 상태를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성의 퇴보로 본다. 이 문제를 분석하는 데서 그가 깊이 기대는 사상가는 마르틴 하이데거다. 하이데거는 이미 20세기 중반,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술을 인간이 세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했고, 인간과 세계를 ‘자원’과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틀, 즉 게슈텔(Gestell)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인공지능 시대 철학의 쓸모』는 이 하이데거의 통찰을 인공지능이라는 현대적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낸다. AI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계산 가능한 데이터의 집합으로 환원한다. 인간의 삶은 효율과 최적화의 언어로 번역되고, 존재는 점점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책은 하이데거 철학의 해설에 머물지 않는다. 기술 문명의 위험을 진단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다시 자신을 붙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한국 사상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을 호출한다.
다석 유영모는 평생 ‘사람’이라는 존재를 물은 사상가였다. 그는 인간을 직업이나 성과, 기능이나 지위로 정의하지 않았다. 다석에게 인간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말과 삶을 일치시키며, 하늘과 세계 앞에서 깨어 있는 존재였다.
이 책은 다석의 사유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먼저 사라질 위험에 놓인 인간의 요소들을 하나씩 짚어낸다. 사색의 시간, 말에 대한 책임, 삶의 절제, 그리고 자기 성찰의 능력이다.
이기상 교수는 분명히 말한다. 인공지능은 계산할 수 있지만 반성하지는 못하고, 최적화를 수행할 수 있지만 삶의 의미를 묻지는 못한다. AI는 수단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목적을 설정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인공지능 시대에 철학의 쓸모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지켜내는 데 있다.
철학은 즉각적인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진다. 속도를 늦추고 질문을 되살리며,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회복하게 한다.
책의 후반부에서 논의는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과 윤리 문제로 확장된다. 저자는 기술 중심의 교육이 숙련된 기능인을 길러낼 수는 있어도, 책임 있는 시민을 길러내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규칙과 가이드라인만으로는 AI 윤리를 담보할 수 없으며,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철학은 당장의 쓸모가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철학이 사라진 사회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회라는 경고가 반복해서 강조된다.
『인공지능 시대 철학의 쓸모』는 기술 낙관도, 기술 비관도 아니다. 기술 한가운데서 인간을 다시 묻는 책이다. 인공지능이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가.
이기상 교수는 하이데거와 다석이라는 두 사유의 축을 통해 그 질문에 흔들리지 않는 철학적 좌표를 제시한다. 이 책이 말하는 ‘쓸모’는 생산성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나침반이다. 인공지능이 생각을 흉내 내는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명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인공지능 시대 철학의 쓸모』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무게로 독자를 붙잡는다.
[그래픽=노트북LM] 아브라함 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