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남정훈 기자]“언니가 37살 중에 제일 빠르고 수비도 잘하는 것 같아요” IBK기업은행 선수들이 주장인 황민경을 두고 놀림 반, 경이로움 반을 섞어 던지는 찬사다. 1990년생으로 새해에 37살이 된 황민경이 평소 후배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덕에 나이 공격을 섞은 칭찬도 가능하다.
세화여고 졸업하고 2008~2009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도로공사 유니폼을 입었던 황민경도 어느덧 프로 18년차의 베테랑이 됐다. 1m74의 단신이지만, 데뷔 초기엔 폭발적인 운동능력과 점프력으로 강한 공격력을 보여줬던 황민경이다. 2011~2012시즌엔 자신의 운동능력을 십분 발휘한 강력한 서브를 앞세워 ‘서브퀸’에 오르기 도했다. 그런 그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과 갖가지 부상에 시달리며 20대 한창 때의 운동능력과 점프는 잃었다.
그럼에도 황민경은 여전히 코트 위에서 빛나는 선수다. 코트 후방에서 몸을 날리는 수비로 소금같은 역할을 해낸다. 8일 화성종합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여자부 4라운드 정관장과의 홈경기에서는 황민경의 이런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날 황민경에게 주어진 역할은 리시브에 다소 약점을 보이는 주전 아웃사이드 히터인 육서영의 후위 세 자리를 맡아주는 것이었다. 네 세트 모두 육서영과 교체로 코트를 밟았다. 득점보다는 리시브와 수비, 궂은일을 해내고 다시 웜업존에 들어가야 하는 짧은 역할이지만, 황민경은 ‘씬스틸러’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IBK기업은행이 세트 스코어 2-1로 앞선 4세트 17-16 상황. 13-16에서 연속 4득점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IBK기업은행으로선 승부를 5세트로 끌고가지 않고 4세트에서 끝내 승점 3을 온전히 챙기기 위해선 점수차를 더 벌려야 했다. 동점을 허용한다면 승부는 다시 안갯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황민경의 진가가 드러났다. 박혜민의 퀵오픈 2개를 그림같은 다이빙 디그로 살려냈고, 두 번째 살려낸 디그는 빅토리아의 오픈 공격 성공으로 연결됐다. 연속 득점 분위기를 이어간 IBK기업은행은 19-16까지 달아났고, 막판 정관장의 맹추격을 힘겹게 뿌리치며 세트 스코어 3-1(25-21 21-25 25-22 25-23)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3연승을 달린 5위 IBK기업은행은 승점 30(9승11패) 고지를 밟으며 3위 흥국생명(승점 33, 10승10패)과의 승점 차를 줄임과 동시에 4위 GS칼텍스(승점 30, 10승10패)와의 승점 차를 삭제시켜버렸다. 경기 뒤 황민경은 세터 김하경과 함께 수훈선수로 선정돼 인터뷰실을 찾았다. 황민경은 “중요한 경기에서 승점 3을 온전히 따낼 수 있어서 기분 좋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IBK기업은행이 여오현 감독대행 체제로 바뀐 뒤 황민경의 역할은 대폭 축소됐다. 킨켈라를 아포짓으로 보내고 빅토리아를 아웃사이드 히터로 세우면서 남은 아웃사이드 히터 한 자리는 육서영이 붙박이 주전을 맡고 있다. 전위에서 공격 생산력이 크게 떨어진 황민경은 세트마다 킨켈라나 육서영의 후위 세 자리를 책임지거나, 두 선수가 흔들릴 때 들어가는 ‘조커’ 역할을 맡고 있다. 선수라면 누구나 코트 위에 오래 머무르고 싶기에 아쉬울 법 하다. 그러나 황민경은 “팀에서 제개 필요로 하는 역할이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 해내야 한다. 웜업존에서 언제든 (육)서영이나 킨켈라가 흔들릴 때 들어가서 보탬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4세트 17-16에서 결정적인 디그 2개로 점수를 가져온 뒤 황민경은 특유의 해맑은 미소로 포효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묻자 “그야말로 도파민이 터졌죠. 중요한 상황에서 수비를 해냈어도 사실 그게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게 되는데, 빅토리아가 득점을 내줘서 고납다. 그 덕분에 저도 기분 좋게 세리머니를 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선수단 주장은 성적을 좋을 땐 빛이 나지만, 좋지 않을 땐 두 배로 괴로운 자리다. 올 시즌 IBK기업은행은 시즌 초반 1승8패 부진에 빠지며 김호철 감독이 사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황민경은 “주장이란 자리가 쉽지 않다. 그래도 선수들 독려하고, 밝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훈련할 때 뭐라도 하나 더 하려고 한다. 선수들과 ‘한 번만 이기면 더 올라갈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 하려고 한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황민경은 지난 2일 페퍼저축은행전에서 통산 500경기 출장을 채웠다. 이에 대해 묻자 “데뷔 때만해도 500경기를 뛸 수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다보니까 그런 기록이 세워진 것 같다”라고 답했다.
지난달 17일 페퍼저축은행전에선 황연주(도로공사, 461개)에 이어 여자부에선 두 번째로 서브득점 400개를 채웠다. 지난해 11월14일 GS칼텍스전에서 서브득점 2개를 올려 399개째를 채운 뒤 8경기만에 400번째 서브득점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황민경은 “그때 주변 모든 사람들이 제 서브득점이 399개인 것을 다 알고 있어서 ‘오늘은 해야지’, ‘이젠 해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안나오던 서브득점이 중요한 상황에서 나왔다. 짜릿했다”라고 답했다. 이어 “웜업존에 있다가 들어가서 서브를 때리려고 하면 100%의 능력으로 서브를 때리기가 힘들다. 이제 제가 경기에 투입되는 상황이 서브득점보다는 수비나 리시브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라고 덧붙였다.
20대 초중반에 힘껏 뛰어올라 강하게 때리는 서브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걸까. 황민경은 “그때만큼의 운동능력이나 점프력을 발휘할 수는 없으니까요”라면서도 “그래도 옆에 있는 (김)하경이도 그렇고, (고)의정이도 장난으로 ‘언니, 37살 중에 제일 빨라요. 수비도 제일 잘해요. 키도 작은데...’라고 놀리는 듯 칭찬인 듯 그런 말을 하기도 해요. 동생들이랑 평소에도 편하게 지내서 그런가봐요”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올 시즌 IBK기업은행에는 여자부 전체를 통틀어 최고참인 임명옥이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합류했다. 황민경과 임명옥은 2015~2016시즌, 딱 한 시즌을 도로공사에서 함께 뛰었던 사이다. 당시 임명옥은 KGC인삼공사(정관장 전신)에서 뛰다 김해란(은퇴)과 맞트레이드되어 도로공사에 합류했다. 오랜만에 명옥 언니와 뛰니 어떠냐고 묻자 황민경은 “커서 만나니까 더 좋은 것 같아요. 10년 전에 도로공사에서 처음 뛸 땐 무섭고 그랬는데, 이젠 무섭지도 않고 그래요. 어릴 땐 4살 차이도 크게 느껴졌는데, 이젠 그 차이가 덜 느껴지나봐요”라면서 “제가 주장에 최고참이었으면 누구와 상의하기도 힘든데, 언니가 온 덕분에 혼자 결정하지 않고 상의할 수 있으니까 그게 참 좋아요”라고 설명했다. 화성=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