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남정훈 기자] 지난 9월 열린 KOVO 여자부 신인 드래프트는 ‘이지윤 드래프트’라 불렸다. 서울 중앙여고 출신 미들 블로커 이지윤(18)의 기량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1m88의 좋은 신장에 기본기가 좋아 대형 미들 블로커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팀 내 미들 블로커 사정에 상관없이 7개 구단 모두 입을 모아 “1순위 지명권이 나온다면 무조건 이지윤”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추첨 결과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따낸 건 2024~2025시즌에 5위를 차지했던 도로공사였다. 2023년, 2024년에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거머쥐며 미들 블로커 김세빈, 세터 김다은을 지명했던 도로공사는 3년 연속 1순위의 행운을 누렸고, 김종민 감독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당연히 이지윤이었다.
이지윤의 이름 석 자는 결코 헛된 명성이 아니었다. 전국체전에 출전한 뒤 곧바로 도로공사에 합류한 이지윤은 아직 고교 졸업장도 받지 않은 선수인데, 프로 10년차 같은 침착함을 보여주며 곧바로 프로 무대에 적응했다. 벌써부터 영플레이어상 수상자 명단에 ‘이지유’까지 썼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부상 등의 변수없이 지금의 활약을 이어가며 ‘ㄴ’만 써서 이지윤 세 글자만 완성하면 된다. 이지윤에겐 행운까지 따른다. 아무리 잠재력이 풍부해도 이지윤의 당초 예정된 자리는 코트 위가 아닌 웜업존이었다. 도로공사에는 베테랑 미들 블로커 배유나와 3년차 김세빈이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 그러나 배유나가 시즌 개막전이었던 지난달 21일 열린 페퍼저축은행전에서 어깨 탈구 부상을 입었고, 6주 진단을 받아 이탈했다. 배유나가 빠진 자리는 자연스럽게 이지윤에게 주어졌다.
덜컥 주어진 주전 자리. 고교 무대와는 차원이 다른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를 법도 한데, 이지윤은 태연하다. 기본기가 워낙 좋아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다. 서브 범실도 거의 없다. 10경기에서 181개의 서브 중 범실은 단 10개에 불과하다. 경기당 하나 꼴이다. 2단 연결도 척척 해낸다. 김종민 감독도 “우리 팀에서 2단 연결을 제일 잘 하는 건 이지윤이다”라고 극찬할 정도다. 미들 블로커 본연의 임무인 블로킹에서는 리딩 능력 등을 더 키워야 하지만, 리딩 능력은 경험치가 쌓여야만 늘 것이기에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27일 김천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여자부 2라운드 페퍼저축은행과의 홈 경기에서도 이지윤의 잠재력과 탄탄한 기본기가 잘 드러난 경기였다. 이날 이지윤은 이동 공격 3개를 시도해 모두 성공시키는 등 공격득점 5점(성공률 50%)에 블로킹 3개, 서브득점 2개를 합쳐 10점을 냈다. 범실은 단 1개에 불과한 깔끔한 플레이였다. 이지윤이 코트 가운데를 든든히 지켜준 덕분에 도로공사는 페퍼저축은행에 세트 스코어 3-0 승리를 거두며 10연승을 달렸다.
승점 28(10승1패)이 된 도로공사는 2위 현대건설(승점 17, 5승5패), 3위 페퍼저축은행(승점 16, 6승4패)과의 승점 차를 10 이상 벌리며 2라운드가 끝나기 전에 벌써 독주 채비를 마쳤다. 게다가 이날 승리가 더욱 뜻깊었던 건 올 시즌 유일한 패배를 안겨줬던 페퍼저축은행에게 셧아웃으로 완벽히 설욕했다는 점이다. 이지윤은 경기 뒤 아웃사이드 히터 김세인과 함께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을 찾았다. 이지윤은 “중간 중간에 위기가 많았어요. 제가 어리바리한 부분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경기였지만, 언니들이 도와준 덕분에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승리 소감을 밝혔다.
이제 갓 프로 무대에 데뷔했는 데도 전혀 ???지 않는 비결을 묻자 이지윤은 “프로 무대를 밖에서 봤을 땐 얼마나 긴장될까 싶었어요. 근데 막상 코트에 들어가서 경기에 집중하다보니 괜찮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무대 체질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코트 위에 서면 집중이 되요”라고 설명했다.
이날 관중석에는 이지윤 응원부대가 200여명 있었다. 이지윤의 아버지는 경남 창녕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 이지윤의 아버지가 본인의 학교 학생들 200명을 단체로 데리고 와 도로공사와 이지윤을 응원했다. 이지윤은 “아빠가 ‘버스 4대 정도 갈거야’라고 해서 깜짝 놀라고 당황했어요. 그래도 그 응원의 힘을 제대로 받은 것 같아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이지윤이 유독 기본기가 탄탄한 이유가 궁금해져 물어봤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코로나19, 그리고 1대1 레슨이었다. 이지윤은 “중학교 때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려서 휴교령이 내려졌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본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아빠 학교 체육관에서 과거 미도파에서 선수로 뛰었던 이정숙 선생님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어요. 1대1로 배우다 보니 기본기와 자세 등을 자세히 배울 수 있었는데, 그때 많이 성장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중앙여중, 중앙여고를 거치면서 장윤희 감독님께도 잘 배웠던 게 비결인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이지윤은 올 시즌 도로공사의 두 번째 경기부터 팀에 합류했다. 전국체전 출전 때문에 개막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도로공사는 올 시즌 두 번째 경기부터 패배를 잊고 10연승을 달리고 있다. 이지윤은 아직 프로에서 한 번도 져보지 않았다. ‘무적의 이지윤’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지윤은 “팀에 들어온 지 한 달 됐는데, 지는 경기를 안 해봤어요. 뿌듯하고 행복해요. 앞으로도 이기는 경기만 하고 싶어요”라고 각오를 다졌다.
어깨 탈구 부상을 입고 재활 중이던 배유나는 최근 선수단에 합류했다. 다음주부턴 가벼운 볼 운동과 팀 훈련을 소화하며 본격적으로 복귀를 준비한다. 그 말은 곧 이지윤도 이제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 대해 묻자 “저는 유나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하며 버티는 게 목표였어요. 언니가 돌아와도 팀 분위기가 밝아질 수 있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그래도 주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느냐’ 묻자 이지윤은 “조금은 그런 맘이 있죠”라고 웃었다. 김천=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