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의 시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차 안에서 보는 낙엽은 쓸쓸하지만 직접 밟으며 걸으면 다르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소리는 새의 날갯짓 같고 여인의 옷자락 같다. 그러면서 속삭인다. 너희도 언젠가 낙엽이 될 것이라고.
낙엽 밟는 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한 계절의 감상이 아니다. 낙엽은 생을 마친 잎이지만 생태계에서 낙엽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다. 낙엽은 흙을 만들고 미생물과 곤충의 먹이가 되며 숲의 순환을 준비한다. 자연이 오래 지켜온 이 원리가 바로 정확한 제거와 정확한 보상, 곧 신상필벌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피드백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피드백 시스템은 유익한 행동을 보상으로 강화하고 해로운 행동을 벌로 억제한다. 세포도 동물 집단도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상식처럼 보이는 이 규칙이 무너지면 시스템은 언제든 흔들린다. 잘한 사람에게는 보상이, 잘못한 사람에게는 책임이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이자 인간 사회의 기본 상식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이 기본을 지키고 있는가? 대개의 삶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작년 12월3일 이후 드러난 사실들은 한국 사회의 되먹임 구조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법의 이름으로 고통을 주었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벌은커녕 보상이 주어졌다. 행동과 결과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단순한 일조차 어려워졌다.
이 오류는 수사·기소·판결의 과정에서 교정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 검찰과 법원은 이 단순한 교정을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접대와 향응을 주고받은 스폰서성 사건, 내부에서 반복된 성비위, 권력자 관련 사건에서의 수사 무마 의혹, 증거 조작,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내부 감찰은 모두 같은 문제를 가리킨다. 행동과 결과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직 전체에 예측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대법원 판사들의 거짓말, 영장 전담 판사의 시민들과 동떨어진 판단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분명해진다.
네트워크 이론은 말단 노드의 고장은 쉽게 교정되지만 핵심 노드가 고장 나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의 핵심 노드는 분명히 고장 났다. 더 심각한 것은 고장 난 핵심이 오히려 스스로 고장이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는 점이다. “결국 큰 처벌은 없다”, “검사는 파면되지 않는다”, “퇴직 후에는 오히려 큰돈을 번다”는 예측이 너무도 당연해졌다. 한국 검찰에서는 행동과 결과의 고리가 끊어져 있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 매우 위험한 신호다.
나뭇잎이 아무리 떨어져도 숲이 유지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파트 단지의 낙엽은 관리원이 치우고 공원의 낙엽은 공무원이 치운다. 숲의 낙엽은 박테리아와 곰팡이가 치운다. 자연에는 언제나 분해자와 청소자가 있다. 인간 사회에서 이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 바로 사법기관이다. 그런데 지금 이 기관은 분해자 역할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오염을 확대하는 측에 서 있다.
진화생물학은 이런 상태를 공동체 협력 기반의 붕괴라고 설명한다. 게임이론에서도 협력 체제가 유지되려면 규범을 어기고도 처벌받지 않는 무임승차자를 제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스템 전체가 무너진다. 사회성 곤충의 집단에서 규범을 깨는 개체를 즉시 제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인간 사회 역시 이 원리를 피해 갈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나 복잡한 개혁이 아니다. 자연이 실천해 온 단순하고 정직한 원리, 즉 정확한 보상과 정확한 처벌, 그 되먹임의 회복이다. 숲은 낙엽을 흙으로 돌려보내며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부패한 가지는 떨어지고 새로운 가지가 자란다. 인간 사회의 봄도 이 원리 위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벌 받아야 할 잘못을 정확하게 벌하고, 보상받아야 할 성실을 정확하게 보상하는 일. 이 단순하지만 엄정한 되먹임 장치를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음 계절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과학이자 최소한의 희망이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