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홍콩에서 열린 '제17회 홍콩 국제 와인&스피릿 박람회'는 아시아 주류 산업의 경쟁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행사장에는 21개국 620여 개 브랜드가 참여했고, 새로 조성된 '월드 오브 스피릿(World of Spirits)' 존에는 13개국 증류주가 자리했다.
올해는 중국과 일본의 존재감이 도드라졌다. 중국 바이주 기업들은 글로벌화를 목표로 대형 부스를 꾸렸고, 일본 사케 브랜드들은 국가적 지원을 등에 업고 적극적으로 바이어 상담을 이어갔다. 반면 한국은 '오미나라' 단 한 곳만 참가해 대비가 더욱 뚜렷했다.
홍콩은 2008년 와인 주세를 전면 폐지하며 아시아 와인 무역의 거점으로 부상했다. 무관세 정책을 기반으로 보관·물류·재수출 인프라를 구축했고, 와인 산업을 무역·관광·문화산업의 축으로 키웠다. 지난해에는 스피릿(증류주) 주세까지 대폭 낮추며, 고도주 시장의 문도 열었다. 정부가 '세수 확보'보다 '산업 성장'을 우선시한 결과다.
이번 박람회에선 그 성과가 명확히 드러났다. 각국 생산자·수입사·바텐더가 어우러져 새로운 협업을 논의했고, 홍콩은 자연스레 아시아의 주류 허브로 기능했다. 폴 챈 홍콩 재무장관이 이번 행사에서 "홍콩은 단순한 주류 시장이 아니라 도약의 발판"이라고 호언한 이유다.
일본도 규제보다 '육성'을 택했다. 국세청이 사케 수출기업의 해외 박람회 참가비를 지원하고, 현지 홍보를 병행했다. 이런 행정 지원이 이어지면서 일본 사케 수출액은 10년 만에 세 배 이상 늘었다. 지역 양조장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고, 주류산업이 국가 수출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출고가를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종가세 체계다. 고급 원료를 사용하거나 숙성 기간을 늘릴수록 출고가가 오르고 세금 부담도 커진다.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에 '벌금'이 따라붙는 구조다. 기업은 프리미엄 제품 대신 저가형으로 방향을 틀고, 소비자는 해외직구나 병행수입으로 눈을 돌린다. 주세가 산업의 발목을 잡는 셈이다.
주세 개편 논의는 매년 되풀이되지만 진전은 없다. 그동안 종가세에서 종량세(도수·용량 기준)로 전환하자는 목소리는 계속됐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번번이 미뤄졌다.
주세 개혁은 단순한 세금 인하가 아니다. 산업 구조를 바꾸는 문제다. 고급 원료를 써도 불이익이 없고, 수출형 양조장에는 인센티브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 기반의 소규모 양조장, 프리미엄 증류주 브랜드, 한국 와인 산업 모두 제도 개선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렵다.
홍콩 박람회장에서 둘러본 '한 병의 술'은 제도와 세제가 산업을 움직이고, 정책이 문화를 키우며, 행정이 시장을 넓히는 상징이었다. 한국의 주류 산업이 낡은 주세의 틀을 깨지 못한다면 세계의 테이블에서 계속 잔도 못 들고 서 있을 것이다. '한 병의 술'이 산업의 바로미터라면, 지금 우리는 '제도의 숙취'에 시달리고 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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