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 간 협상에서 3500억 달러(약 49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합의가 이뤄지며 한국 경제가 한 고비를 넘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가 제시한 연간 200억 달러(약 28조5000억원) 투자 한도를 지켜내면서 외환시장 충격 우려도 완화됐다. 그러나 일부 분야에서 양 정부 고위관계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엇갈리는 발언이 나오면서 문서화할 때까지는 좀 더 조율이 필요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30일 엑스(X) 글에서 “한국은 시장을 100% 완전 개방하는 데도 동의했다”고 적었다. 이는 무역 성과를 국내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과장한 표현일 수 있으나 쌀·소고기를 포함한 농산물 시장에서 추가 개방을 막았다는 한국 정부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오른쪽)이 29일 경북 경주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대통령 주최 정상 특별만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이 이번 협상 결과를 담은 공식 문서에 서명할 때까지 반도체 등 품목별 관세의 세부 적용 방식을 두고 앞으로도 당분간 줄다리기를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 정부도 양측간 합의에 대한 해석 논란을 피하기 위해 반도체 관세를 포함한 합의 내용의 문서화를 추진 중이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반도체 부분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양국 간 합의 내용을 바탕으로 발표했고 관련 문서도 막판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결국 양측이 이런 내용으로 합의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추후 반도체 관세에 대한 구체적 협상 과정에서 합의 내용이 반영되리라는 게 대통령실의 설명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이번 합의로 반도체 분야에서 대만과 동등한 입지를 확보해 불확실성을 제거한 것”이라며 “관련 문서에 대해서도 마무리 검토 작업 중”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아직 대만과는 무역 협상을 타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만에 대한 반도체 관세를 어떻게 할지 정한 바가 없어 반도체 관세가 한미 무역 합의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보다 앞서 전날 한미정상회담 후 오찬에서 한미 무역 협상 전격 타결 소식이 들려왔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곧바로 경북 경주 APEC 미디어센터에서 브리핑을 통해 이번 협상 세부 결과를 발표했다. 협상은 ▲현금 투자 2000억 달러(약 284조6000억원) ▲조선업 협력사업 ‘마스가 프로젝트’ 1500억 달러(약 213조4500억원) 등 두 축으로 구성됐다.
현금 투자는 연간 2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단계적으로 이뤄진다. 외환시장 불안이 예상될 경우 납입 시기와 금액을 조정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됐다. 투자 약정 기간은 2029년 1월까지다.
김 실장은 “외환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이 발생하지 않도록 납입 조정 근거를 마련했다”며 “실제 조달이 장기간 분산돼 외환시장 부담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같은 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외환시장 영향을 최소화한 선에서 잘된 협상을 이끌었다”며 “150억~200억 달러 범위는 시장이 감내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정부는 이번 투자 재원을 외환보유액 운용수익으로 충당한다는 방침이다. 김 실장은 “외화자산 운용에서 발생하는 이자·배당 수익으로 대부분 충당이 가능하다”며 “국내 외환시장 자금으로 직접 조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220억 달러(약 601조원)이며 이 중 유가증권 규모는 3784억 달러다. 연 5.3% 수준의 운용수익을 거둘 경우 연간 200억 달러 조달이 가능하다. 한국투자공사는 운용자산 2276억 달러에서 연간 수익률 11.73%를 기록 중으로 이를 근거로 정부는 외환수익 활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수익이 부족할 경우 정부보증채를 해외시장에서 발행할 계획이다.
이번 합의에는 투자 원리금 보장을 위한 안전장치도 포함됐다. 양국은 상업적 타당성이 있는 프로젝트에만 투자하며 원리금 상환 전까지 수익을 5대5로 나누기로 했다. 김 실장은 “이익배분 비율은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수익성이 낮은 분야에 대한 강제 투자를 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관세 부문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미국은 한국산 자동차에 부과하던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이는 유럽연합(EU), 일본과 동일한 수준이다. 반도체 역시 주요 경쟁국인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도록 조정됐다.
다만 일각에서는 외환보유액 운용수익을 매년 30조원 가까이 해외 투자에 투입할 경우 장기적 외환 여력과 GDP 구성항목인 투자 부문에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국내 설비투자 여력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