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자기책임 원칙 없는 금융소비자 보호는 정치 구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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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자기책임 원칙 없는 금융소비자 보호는 정치 구호다

한국은 투자 열기에 비해 금융 이해도가 낮다. OECD가 지난해 발표한 금융 이해력 조사에서 한국은 100점 만점에 62점을 기록했다. 평균(64점)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재테크 열풍이 뜨거운 나라에서 기초적 금융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문제는 단순한 수치에 그치지 않는다. 투자상품과 원금보장 상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비자가 여전히 많다. 주식, 주가연계증권(ELS), 상장지수펀드(ETF)는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투자상품이지만, 예금처럼 안전하다고 오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홍콩H지수 ELS 손실 사태가 대표적이다. 금융감독원은 해당 상품을 판매한 은행이 고령층에 원금보장 상품처럼 설명했다며 불완전판매로 결론 내리고 배상 비율을 제시했다. 그러나 투자상품 손실에도 배상이 가능하다는 신호를 준 순간, 시장에는 "주식 손실도 배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팽배해진다.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지난달 은행장들과의 첫 상견례 자리에서 '금융소비자 보호'를 대원칙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그는 "더는 ELS 불완전판매 등과 같은 대규모 소비자 권익침해 사례는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감독당국이 금융소비자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둔다면 은행의 투자 상품 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예·적금, 국채만 판매토록 하고,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주식·ELS·ETF·펀드 등의 투자 상품은 금융투자업권에서만 판매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작 금감원은 은행에서 제한적으로 ELS 상품을 판매하도록 허용했다.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대목이다.


근본적 해법은 금융교육 강화다. 소비자가 투자와 원금 보장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소비자 보호다. 그러나 교육에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성과도 단기간에 드러나지 않는다. 금감원이 '쉬운 길'인 배상과 규제에 의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융감독의 본질은 여론에 휘둘리는 단기 처방이 아니다. 변화하는 금융환경 속에서 원칙과 철학을 세우는 일이다.


금융소비자 보호는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쉽고, 피아(彼我)가 분명한 이슈다. 신임 금감원장이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조하는 취지는 이해되지만,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단기적 인기와 정치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자기책임 원칙을 외면한 소비자 보호는 제도적 실효성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 없는 금융소비자 보호는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적 해이를 불러 오히려 금융시장 건전성을 해칠 우려가 크다. 금융시장에서 '투자의 자기책임 원칙'은 훼손되어선 안 될 기본전제다.






황윤주 기자 h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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