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려울 때는 자본시장도 경색됩니다. 중소·중견기업은 직접 회사채를 발행하기가 더 어렵죠. 그때마다 정부 보증을 제공하고 대신 판매해 자금을 지원해왔어요. 내년부터는 직접 발행에 나서 기업의 이자부담을 덜어줄 겁니다. 다행히 투자자들의 반응도 좋아요."
최태진 신용보증기금 자본시장기획관은 최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상반기 약 4000억원 규모로 유동화증권(P-CBO)을 직접 발행할 계획"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P-CBO는 중소·중견기업도 은행 대출이 아니라 직접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돕는 상품이다. 신용도는 낮지만,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의 회사채를 매입하고, 신보의 신용보증을 더해 투자자에게 판매한다. 규모가 커진 중견기업 혹은 중소기업이 간접금융 시장을 벗어나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직접 조달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신보는 이를 통해 지난 25년간 누적 약 70조원 이상을 자본시장에 공급했다.
신보의 P-CBO는 경제위기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 기획관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회사채 만기가 도래한 기업의 차환 발행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도 대규모 물량이 들어갔다"며 "진짜 시장이 어려울 때마다 경제 안전망 역할을 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성장한 신보의 P-CBO는 현재 발행시장에서 약 85%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신보의 P-CBO 발행액은 4조4866억원으로 전체(5조2866억원)의 84.9%에 달한다. 올해도 상반기까지 2조7624억원을 발행해 전체(3조2496억원)의 85% 점유율을 유지 중이다.
신보의 P-CBO 발행은 올해 4월 '신용보증기금법'이 개정되면서 변곡점을 만났다. 그간 증권사 등이 유동화회사(SPC)를 만들어 판매해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25년 만에 신보가 직접 발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직접 발행이 가능해진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경제 위기 때문이었다. 최 기획관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자금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기존 1조원대였던 발행 물량이 연간 5조원까지 확대되고, 상시 자금조달수단으로 자리 잡았다"며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직접 발행에 나서보자는 인식도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2022년 레고랜드 사태가 발생하며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최 기획관은 "당시 국내 채권시장은 붕괴 우려가 나올 정도로 경색됐던 상황"이라며 "신보는 리스크를 떠안고 과감히 P-CBO를 발행해 기업들을 지원했다. 신보의 자본시장 안정화 역할이 다시 한번 부각된 계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직접 발행은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의 비용 절감으로 되돌아간다. 최 기획관은 "증권사에 부담해야 하는 수수료가 없어지면서 기업이 부담하는 금리가 약 0.5%포인트 낮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이는 3년 만기로 1조5000억원 규모를 직접 발행할 경우 연간 75억원, 3년간 총 225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라고 설명했다.
위험가중치가 0%로 내려가면서 투자 매력도도 높아졌다. 최 기획관은 "직접 발행으로 신보의 P-CBO는 특수채로 인정받게 된다. 그동안 금융감독원 시행세칙 등에 따라 그간 위험가중치를 1.6% 부여받았는데, 0%로 내려가게 된 것"이라며 "국공채와 신용도는 같으면서도 수익률은 높은 우량 투자처로 인식되면서, 상당히 매력이 있다는 투자자들의 실제 피드백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신보는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직접 발행을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지난 7월 최초로 자본시장 업무를 총괄하는 자본시장기획관을 신설했고 산하에 '직접발행 추진단'을 구성했다. 최 기획관은 "첫 발행 규모는 약 4000억원가량이 될 것"이라며 "정부 정책 기조에 맞춰 첨단전략산업이나 기업을 좀 더 지원해주는 방향으로 상품을 기획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업재편업종 중 정책지원이 필요한 기업이나, 미국 관세 등으로 일시적으로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도 담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해외 직접 발행도 구상 중이다. 최 기획관은 2022년 5월 유동화센터장을 역임하며 해외 P-CBO 발행을 경험했다. 그는 "해외 발행은 처음이어서 과연 자금 조달이 가능할까, 신보를 알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훨씬 저렴한 금리(0.35%포인트)로 발행에 성공했다"며 "올 5월 대위 변제 없이 정상 상환도 돼 성공적인 선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발행 경험이 쌓이면 해외에서도 P-CBO를 직접 발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보는 P-CBO 직접 발행에 이어 지난 4월 중견기업 QIB(적격기관투자자) 회사채보증에 나서며 자본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금융기관·펀드·연기금 등 위험 관리능력이 충분한 적격기관투자자 간에서 채권·증권을 매매할 수 있도록 하되, 공시의무 등을 완화한 제도다. 2012년 도입 이후 사문화된 시장이었으나, 신보가 QIB 회사채의 원리금을 지급보증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사실상 재개됐다. 이를 담당한 최 기획관은 "거의 죽어있던 제도를 산업은행과 함께 살려낸 셈"이라며 "앞으로도 기업에 새로운 자금조달 옵션과 조달비용 절감 기회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혜민 기자 hmin@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