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대만과 대규모 반도체 투자를 조건으로 관세 협상을 타결한 가운데, 한국을 포함한 주요 반도체 생산국을 향해 '100% 관세' 카드를 다시 꺼내 들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대만에 적용된 관세 면제 기준이 향후 한미 협상의 가늠자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이날 뉴욕주 시러큐스 인근에서 열린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신규 공장 착공식에서 미국에 투자하지 않는 반도체 생산국은 고율 관세를 피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고 싶은 모두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서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정 국가나 기업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한국과 대만이 글로벌 반도체 생산의 핵심 국가라는 점에서 사실상 두 나라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8월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반도체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이후 관세 전면 도입은 유예하고 반도체 수입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주요 수출국과 협상을 진행해 왔다. 이에 미국은 지난해 10월 한국과 3500억 달러(약 516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조건으로 상호관세를 15%로 내리는 합의를 이루었고, 지난 15일에는 대만과 관세 합의를 체결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대만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종전 20%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대만 기업·정부가 각각 미국에 2500억 달러(약 368조원)씩 총 5000억 달러의 직접 투자와 신용 보증을 제공하기로 했다. 또 미국이 공개한 '반도체 관세 면제' 조건에 따르면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신설하는 대만 기업의 경우, 공장 건설 기간 동안에는 해당 신규 생산능력의 2.5배에 해당하는 수입 물량까지 관세를 면제하기로 했다. 공장이 완공된 이후에도 신규 생산능력의 1.5배까지는 무관세 수입을 허용한다는 방침이다.
대만에 적용된 이 같은 조건은 향후 한미 간 반도체 협상에서도 기준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한미 무역 협상에서 대부분의 한국산 상품에는 15% 관세가 적용됐지만 반도체 관세 계획은 확정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한국은 경쟁국인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지 않겠다는 원칙적인 약속을 미국 측으로부터 받은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5일 미국 내 반도체 제조역량 강화에 기여하는 제품을 제외한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장비, 그 파생 제품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하는 등 자국내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러트닉 장관은 CNBC와 인터뷰에서 대만 반도체 생산능력의 40%를 미국으로 이전하겠다는 목표도 언급했지만 대만 내부에서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궁밍신 대만 경제부장은 "러트닉 장관이 어떻게 계산했는지 모르겠다"며 "대만은 여전히 반도체 생산의 요충지이고, 미국은 인공지능(AI) 응용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다. 양측은 협력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5㎚(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첨단 공정 기준으로 볼 때 대만과 미국의 생산 비중은 2030년 85% 대 15%, 2036년 80% 대 20%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TSMC도 대만 내 핵심 기술의 자국 내 유지 입장을 재확인했다. 황런자오 TSMC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미국 내 첨단 웨이퍼 제조 역량 확대에 속도를 내겠다고 하면서도 "대만이 여전히 최첨단 제조 기술을 보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첨단 기술은 대만에서 먼저 안정화한 뒤 해외 이전이 가능하며 실제 이전과 대량 생산에는 최소 1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황 CFO는 앞서 15일 콘퍼런스콜에서도 2나노(N2) 이하급 첨단 신규 공장의 약 30%가 미국에 들어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웨이저자 TSMC 회장은 같은 콘퍼런스콜에서 애리조나주 공장 확장을 위해 추가 부지를 매입했다고 밝혔으며, 신규 매입 규모는 3.65㎢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반도체 전문가 밥 오도널은 대만 통신사 CNA에 "공급망 이전에 일부 진전이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생산 능력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만의 주요 생산 능력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아주경제=이은별 기자 star@a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