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 한쪽에 약통을 올려두는 일은 어렵지 않다. 혈압약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면 상황은 급해진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는 사이, 손은 습관처럼 커피 잔을 먼저 집는다. 약통은 그대로 남는다.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젊은 연령층에서도 만성질환 진단 비중이 늘고 있다. 게티이미지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면, 같은 선택은 다음 날에도 반복된다.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당뇨병을 진단받은 이들 사이에서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병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미 진단을 받았고, 수치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다만 당장 불편하지 않다는 이유로 치료는 늘 뒤로 밀린다. ‘조금만 더 있다가’라는 판단이 쌓이는 사이, 관리의 출발선은 점점 멀어진다. ◆“약 안 먹어도 멀쩡했어요”…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차이
12일 질병관리청이 공개한 만성질환 관련 자료를 보면, 진단 이후 치료로 이어지지 않는 사례는 여전히 적지 않다. 고혈압 환자의 상당수는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지만,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비율은 그보다 낮다. 고지혈증 역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치료를 미루거나 중간에 약을 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료진은 이를 단순히 ‘약을 안 먹은 문제’로 보지 않는다.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수치는 단기간에 통증이나 불편을 만들지 않는다. 수치가 조금 높아도 일상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다. 치료의 필요성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 이유다.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내과 전문의는 “처음 몇 년은 약을 안 먹어도 정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며 “그래서 환자 스스로 ‘괜찮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뒤늦게 치료를 시작한 환자들 상당수가 진료실에서 ‘그땐 정말 멀쩡했었다’고 말한다”며 “문제는 그 시간이 쌓인 뒤에 나타난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당뇨병도 다르지 않다…약보다 어려운 건 생활 관리
당뇨병은 상대적으로 치료 시작 비율이 높은 질환이다. 그러나 목표 혈당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환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약만으로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식사 조절과 운동, 수면 관리가 함께 이뤄져야 하지만, 이를 장기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전문의는 “증상이 뚜렷하지 않으면 치료 강도를 스스로 낮춰도 된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며 “약을 줄이거나 생활 관리를 느슨하게 하면서 혈당이 다시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치료를 시작하는 시점이 장기 예후를 가른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티이미지 고혈압·고지혈증·당뇨병의 공통된 배경에는 비만과 생활습관이 있다. 활동량은 줄고 식습관은 달라지면서 체중이 늘었고, 그 변화가 혈압과 혈당, 콜레스테롤 수치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30~50대 연령층에서도 만성질환 진단 시점이 빨라지는 흐름이 나타난다. 체중이 늘수록 관리해야 할 지표는 많아진다. 복용 약은 늘고, 치료 부담도 커진다. 생활습관 개선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강조돼 왔지만, 흡연이나 고위험 음주 비율은 뚜렷하게 줄지 않았다. “예전보다는 줄였다”는 말이 스스로에게 면죄부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치료가 늦어지는 이유, 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치료 지연의 원인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잦은 야근과 회식, 불규칙한 식사 구조 속에서 건강 관리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다. 치료를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배경이다.
반대로 치료를 시작한 이후의 변화는 비교적 분명하다.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는 조절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당뇨병 역시 생활 관리에 성공한 사례는 적지 않다. 의료 현장에서는 치료 효과보다, 치료를 시작한 시점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만성질환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관리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루 이틀 약을 거른다고 바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선택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되돌리기 어려워진다.
의료진은 수치보다 인식을 더 경계한다. “치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관리는 멀어집니다. ”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