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페르소나.’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배우 안성기의 데뷔 60주년 회고전을 준비하며 고른 제목이다. 특정 감독의 페르소나가 아닌, 한국영화 전체의 얼굴이라는 평가였다. 그의 이름 석자가 곧 한국영화사 그 자체였던 셈이다.
다섯 살에 아역 배우로 데뷔한 뒤 평생을 스크린과 함께하며 출연한 170여편의 작품에서 그는 소매치기 소년, 비리 경찰, 빈민촌의 서민, 조직폭력배 보스, 북파공작원 교관, 한물간 가수의 매니저 등 폭넓은 인물을 연기하면서 코미디와 멜로, 드라마, 액션을 넘나들었다. 그는 작품을 위해서라면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았고, 특정 이미지에 머무르기보다 시대와 함께 변주되는 인물을 통해 한국 영화의 다양한 얼굴을 스크린에 남겼다. 그의 이름 앞에 자연스럽게 ‘국민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이유기도 하다.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충무로의 영화 기획자였던 부친 안화영씨가 친구였던 김 감독이 급히 아역배우를 찾자 막내아들을 데려간 것이 계기였다. ‘연기 천재’라는 평가 속에 아역 시절에만 7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김 감독의 ‘10대의 반항’(1959)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고교 진학 후 학업과 군 복무(ROTC)로 약 10년간 스크린을 떠났다.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한 그는 전공을 살려 현지 취업을 준비했으나 베트남 패망으로 계획이 무산됐다. 대학 졸업 후 막막한 취업준비생 시기를 보내던 그는 1977년 김기 감독의 영화 ‘병사와 아가씨들’을 통해 성인 배우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아역 시절의 명성은 잊힌 채 사실상 신인 배우로 다시 출발했다. 전환점은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급속한 도시화의 문제가 표면화된 1980년대 초, 강남 개발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고인은 어리숙한 중국집 배달부 ‘덕배’를 연기해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다. 이후 1980∼90년대 한국영화는 안성기를 빼고 논할 수가 없을 정도다. 당시 젊은 감독들에게 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 ‘고래사냥’(1984),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여러 성공작을 함께 만들었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태백산맥’(1994), ‘축제’(1996) 등에서도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1988)을 비롯해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남겼다. 정지영 감독과는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등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함께했다.
배우 박중훈과는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를 시작으로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 스타’(2006)까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콤비로 사랑받았다. 한국영화 역대 첫 천만 영화인 ‘실미도’(2003)를 비롯해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형사 Duelist’(2005), ‘화려한 휴가’(2007), ‘부러진 화살’(2012), ‘화장’(2015) 등에서 다채로운 얼굴을 보여줬다. 그는 특유의 온화한 성품으로 영화계에서 ‘중재와 조율의 달인’으로 통했다. 2000년대 초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한국 영화산업 현안에도 앞장섰다.
각종 광고와 공익 캠페인에서도 트레이드 마크인 주름진 환한 미소로 ‘신뢰’ 이미지를 남겼다. 1983년부터 30년 넘게 한 커피 브랜드 광고에 출연하며 최장수 모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고인은 2020년 혈액암 진단을 받았으나 투병 중에도 영화 ‘카시오페아’, ‘한산: 용의 출현’, ‘탄생’ 등에 출연하며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인은 한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를 인정받아 2013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2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1992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봉사한 공로로 2023년 4·19민주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 아내 오소영씨(조각가)와 아들 다빈·필립씨 등이 있다. 장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원로배우 신영균이 명예장례위원장을, 배창호 감독 등 4명이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다. 배우 이병헌·이정재 등은 운구에 참여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발인은 9일 오전 6시.
이규희 기자 l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