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떠올릴 때 많은 한국인이 흥미롭게 느끼는 문화 가운데 하나가 '가업을 오래 이어가는 전통'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전 세계 백년기업의 40%가 일본에 있다고 할 정도인데요. 일본 언론도 '전세계에서 보기 드문 장수 기업 대국'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백 년을 물론 천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곳도 적지 않은데요. 오늘은 일본에 유독 오래된 가게와 기업이 많은 이유에 대해 들려드립니다.
백년기업 4만5000곳…천년 기업도 11곳이나 돼일단 일본에 얼마나 많은 장수기업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장조사 업체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업력 100년이 넘는 기업만 4만5284곳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100년은 사실 업력이 짧은 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업력이 200년 이상 된 곳이 1813곳, 300년 이상은 889곳, 500년 이상은 47곳이었습니다. 에도시대(17세기 초) 창업한 기업은 3474곳, 에도막부 출범 시점인 1603년 이전에 창업해 현재까지 영업 중인 곳도 178곳이나 됩니다. 특히 업력이 1000년 이상 된 기업도 11곳이나 되는데요. 가장 오래된 곳은 1444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곤고구미(금강조·金剛組)'입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도 꼽히는데요. 사찰 등 목조 건축을 도맡는 기업입니다.
곤고구미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는데요. 578년 쇼토쿠 태자는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백제에서 3명의 장인을 일본으로 초청합니다. 당시 일본의 기술로는 큰 사찰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백제에서 기술자를 불러들였습니다. 이 세명 중에서 '금강(金剛)'이라는 이름의 기술자가 남아서 계속 사업을 맡게 되는데요. 이것이 곤고구미의 시초라고 하죠. 이곳은 지금도 '장인회'를 조직, 전통 목조 기술을 전수하는 데도 힘쓰고 있습니다.
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료칸으로 기네스에 등재된 '게이운칸'도 705년부터 영업을 이어왔던 곳입니다. 야마나시현 니시야마 온천에 위치한 이곳은 예로부터 여러 예술인 등 유명 인사들이 찾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해요.
이 밖에도 1024년 창업해 불교 의식용 도구를 판매하는 '슈미야 신불구점'도 천년 기업으로 꼽힙니다.
장수기업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은 어딜까요? 제국데이터뱅크는 해당 지역의 기업들 중 업력이 100년 이상 기업이 몇 곳 있는지 그 비율을 계산해 '장수기업 출현율'로 이름 붙였는데요. 지역별로 보면 장수기업들은 대체로 교토부(5.35%)에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도쿄가 수도가 되기 이전, 일본의 중심지 역할을 오래 했기 때문에 이곳에 몰려있게 된 것 같네요.
도쿄도의 경우 기업 자체의 수는 많지만 장수기업 비율은 2.24%로 전국 38위에 그쳤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야마가타현(5.34%), 니가타현(5.02%), 후쿠이현(4.62%) 등 연안 지역에 장수기업들이 많았다는 것인데요. 에도시대 중기에 교역으로 번성한 지역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신에 규슈 지역이나 대도시가 있는 곳에서는 장수기업 출현율이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제일 적은 곳은 오키나와현(0.17%)이었는데, 이곳에 그나마 있는 백년기업, 백년가게들은 전부 오키나와의 전통주 '아와모리' 양조장이었다고 해요. 원래 양조장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 많은데요. 일본 양조장 가운데 80.5%가 장수기업이라고 합니다. 이 밖에도 설탕, 식초 등 전통적인 제조업도 장수기업으로 명맥을 오래 이어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장수기업들이 본업으로 돈을 번 이후에 임대사업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창업 당시에 다른 사업을 주력으로 하다가, 공장 등이 있던 부지에 빌딩 등을 건설하고 임대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인데요. 본업보다 임대수익이 더 쏠쏠하게 나게 되면서 아예 업종을 전환한 기업들도 많다고 합니다. 역시 제일 좋은 것은 건물주라는 법칙이 일본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어떻게 장수기업 됐을까…지리적 환경·가족 중시 전통 영향
전문가들도 일본에 장수기업이 많은 이유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했습니다. 제국데이터뱅크 보고서에 실린 설득력 있는 주장들을 몇 개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일본의 지리적 환경 때문입니다. 일본이 섬나라기 때문에, 직접 자급자족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죠. 이 때문에 하나를 만드는 기술을 오래 보존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국토 전체가 황폐해지는 큰 전쟁을 겪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2차세계대전을 제외하면 외국에서 아예 국토 전체를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큰 화 없이 오래도록 기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또 일본 특유의 가문 문화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직계 혈연을 이어가는 것보다 가문 자체를 존속하는 것을 중요시했다고 해요. 그래서 사위나 양자를 들여도 가문 자체가 유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큰 반감이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백년기업 대부분이 사위, 양자 등을 데려와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가업이라고 하지만 폐쇄적으로 혈연만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외부 인재 등용이 나름대로 이뤄지는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후계자에 흔들리는 장수기업그러나 최근 장수기업들도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경영자들은 고령화되고 있는데, 가업을 물려받으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사에 따르면 백년기업 대표들 중 31.8%가 60대로 집계됐다고 합니다. 일반 기업 대표들 중 60대가 27.2%를 차지하는 것을 고려하면 다소 고령화가 진행된 편인데요.
문제는 장수기업의 후계자 유무를 조사했을 때 후계자가 있다고 답변한 곳이 47.4%, 없다고 한 곳이 51.0%로 나타난 것입니다.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기업이 절반이 넘는 상황이죠. 이 때문에 최근 일본에서는 후계자를 찾지 못한 기업끼리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지리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오랜 시간 생존해 왔지만, 저출산과 고령화 흐름 앞에서는 기업의 경영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시대, 장수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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