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와 제주4.3범국민위원회가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 시기 전국 경찰을 총괄했던 조병옥 전 경무부장의 과오를 기록한 안내 표지판 철거를 요구한 천안시를 규탄하고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제주4.3범국민위 관계자들이 18일 천안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두 단체는 18일 오전 천안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왜곡과 역사누락으로 일관하는 천안시와 사적관리소의 태도를 규탄한다”며 “조병옥의 과오를 기록한 안내 표지판을 12월 31일까지 철거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들 단체는 지난달 9일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조병옥 생가 앞에 조병옥의 제주4·3사건 관련 책임을 기록한 안내 표지판을 설치했다. 단체들은 1999년 제정된 제주4·3특별법과 2003년 확정된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제주4·3 희생자의 86.1%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으며 이 과정의 최종 책임자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조병옥을 지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천안시와 사적관리소가 해당 표지판 설치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거나 방조해 왔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병옥을 ‘구국의 결단을 내린 인물’로 평가하는 천안군수 명의의 표지석과 안내판을 유지해 왔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이러한 안내가 “천안 시민과 제주도민, 희생자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단체들은 또 천안시가 수십 년간 조병옥을 ‘자랑스러운 인물’로 홍보해 왔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 제기 이후에도 조병옥 홍보책자 발간 시도와 태조산 보훈공원 내 안내판 설치 등 반역사적 행태를 지속해 왔다고 주장했다.
특히 2021년 병천 독립만세기념공원 내 ‘그날의 함성’ 조형물에 포함됐던 조병옥 동상을 철거·교체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시민 혈세가 투입됐음에도, 당시 천안시와 사적관리소가 동상 존재를 부인하다가 학예사와 작가 등의 진술로 사실이 드러났던 전례를 언급하며 “이미 한 차례 과오를 범하고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체들은 “조병옥은 1948년 경무부장으로서 제주도민 약 3만 명 학살에 책임이 있고, 1951년 거창 양민학살 책임으로 내무부장관에서 해임된 인물을 천안을 빛낸 인물로 홍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고 반문했다.
이들은 최근 제주도에서 박진경의 과오를 병기한 민관 공동 안내판이 설치된 사례를 언급하며, “공적만을 기록하던 기존 방식을 수정한 모범 사례”라며 천안시 역시 전향적인 자세 변화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더불어민주당을 향해서도 “조병옥을 당의 뿌리로 소개하면서 과오와 학살 책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재명 대통령이 과거 “자랑스러운 역사와 부끄러운 역사 모두를 공정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밝힌 발언을 언급하며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인물로,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와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시기 경찰 조직 정비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경무부장으로 임명돼 치안 조직의 기틀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내무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등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도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평가돼 왔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조병옥을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 기여한 인물’로 기념해 왔다는 것이 천안시 측의 인식이다.
다만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공적이나 경력과 별개로, 국가 공권력의 최종 책임자로서 민간인 학살에 연루된 역사적 책임 또한 함께 기록돼야 한다”며 “공과(功過)를 분리하거나 선택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이야말로 역사왜곡”이라고 지적했다.
천안=글·사진=김정모 기자 race121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