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힙지로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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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힙지로의 운명

을지로의 밤은 화려해졌다. 직장인들이 회식을 위해 찾던 뒷골목이 아니다. 국내외 젊은이들이 찾는 '힙지로(hipster+을지로)'로 변신했다. 해가 지기 무섭게, 을지로3가역에서는 젊은이들이 맛집을 찾아 오른다. 가게 간판이 없어도 잘만 찾아온다. 예약은 필수고 줄서기는 일상이다.


낮에는 상상도 못 할 변신이다. 을지로의 아침은 삼륜 오토바이들의 종횡무진 배달로 시작된다. 좁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며 인쇄물을 나른다. 후진 골목길에 찾아드는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힘든, 중장년층 라이더가 대부분이다. 인쇄소에서는 각종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휘날리는 먼지 속에서는 종이 냄새와 땀 내음이 잔뜩 배어있다.


밤과 낮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젊은이들의 등장 시간이 빨라졌다. 힘차게 돌아가는 인쇄소 옆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출현으로 철거를 앞둔 구도심은 문화의 거리로 변해가고 있다. 경제 활동 측면에서는 생산의 거리가 서비스의 거리로 바뀌고 있다.


을지로만의 변화가 아니다.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불리는 성수동의 변화 양상은 힙지로를 뛰어넘는다. 패션, 뷰티, 캐릭터, 영화,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의 '팝업 스토어의 성지'가 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바꾸고 있다. 팝업 스토어는 기획 전시처럼 특정 제품을 제한된 기한 내 팔고 빠지는 가게를 말한다. 성수동의 부흥을 이끈 무신사가 뿌리를 내린 것도 벌써 6년 전이다. 이제는 신발 공장과 인쇄소의 도시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린다.


그릇에 따라 외형이 바뀌는 액체처럼 거리의 정체성은 젊은이들의 발걸음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의 정체성은 머물러 있지 않고 흐른다는 점에서 '액체 현대'라고 정의했는데, 그 실사판을 보는 듯하다.


변화의 주역은 20~30대이다. 힙지로에서 먹고 마시고, 성수동에서 옷을 사며 정체성을 형성한다. SNS를 통해 공유하고, 다른 이들을 거리로 불러낸다. 바우만은 이들이 새로운 물건, 경험, 유행을 좇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재정의하려 한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동안 도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됐다. 대규모 개발사업이 있었던 것도, 초고층 빌딩을 건립한 것도 아니다. '낡아서 새롭다'는 뉴트로(newtro) 감성을 즐기려는 이들의 등장과 함께, 을지로는 힙지로라는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됐다. 지금의 도시 재생은 이런 변화에서 시작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숴야 새로 짓는 것도, 새로 지어야 사람이 몰리는 것도 아닌 시대다. 요즘 서울 강남에서도 신축 유령상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런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힙지로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 성수동에서 재미를 본 건물주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몰리면 자본이 찾아든다. 임대료가 올라가면서 인쇄소들이 경기도 파주로 빠져나가고 있다. 힙지로 본연의 분위기가 금방 사라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골목 곳곳에서 들린다.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 등의 전철을 밟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임대료 상한 설정 등의 자발적 도시 재생을 도울 방안은 많다. 거창한 개발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굽어보고 살펴볼 시점이다.






황준호 기자 rephw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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