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고아’는 중국 원나라 극작가 기군상의 희곡을 고선웅 연출이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 진나라 도안고 장군의 모략으로 조씨 문중 300명이 몰살된 뒤, 유일한 생존자인 조씨고아가 가문을 드나들던 시골 의원 정영에게 극적으로 구조된다. 정영은 낯선 아이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견뎌야 했고, 마흔다섯에 얻은 늦둥이를 대신 바치는 극단적 선택에 이른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벼린 복수는 마침내 완성되지만 그 자리에 남는 감정은 통쾌함이 아니라 깊은 허무다. 고선웅이 던진 질문은 선명하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국립극단 제공 “복수는 정답인가. 이 끝없는 고리는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이번 시즌에서도 ‘고선웅표’ 연출의 미학은 힘을 잃지 않았다. 절묘한 타이밍의 유머와 냉정한 비극을 오가는 감정의 리듬, 생활어의 숨결을 살린 배우들의 조리 있는 발성, 그리고 장면 곳곳에 삽입된 묵자(墨子)의 개입이 촘촘히 배치되며 작품의 독특한 음악성을 이룬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대의 규모다. 객석 수만 놓고 보면 명동예술극장의 547석에서 해오름의 1221석으로 약 두 배 늘어난 정도지만, 체감은 훨씬 크다. 실제 무대 면적으로 비교하면 126.5㎡에서 1334.4㎡로 열 배 이상 확장됐다. 초반에는 이 커진 스케일이 오히려 작품의 밀도를 낮춘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배우들의 동선이 길어지면서 장면 간 티키타카가 다소 느슨해지고, 농축된 정서가 넓은 공간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에스프레소’에서 ‘아메리카노’로 바뀐 듯한 인상을 준 것이다.
이에 대해 고선웅은 “여러 지방 대극장에서 공연해보니 서사의 중량감과 미장센이 오히려 더 잘 살아나는 경우가 있었다. 언젠가 해오름극장에서 올려보고 싶다는 여망이 늘 있었다”고 프로그램북을 통해 설명했다.
실제 무대가 익숙해지면서 연출가가 말한 ‘서사의 중량감’과 ‘미장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작진은 이태섭 디자이너의 미니멀한 무대를 해오름에 거의 그대로 옮겼다. 텅 빈 마루와 수직으로 내려오는 커튼, 정영 가족의 조촐한 묘, 거대한 쇠사슬로 여닫는 성문, 그리고 잘린 팔과 같은 상징적 소품들이 대극장 특유의 깊이와 높이 속에서 새로운 질감을 만들어냈다. 장치가 과하지 않은 만큼 인물의 고독과 무력함이 오히려 더 크게 울렸다. 커진 공간이 인간의 운명적 왜소함을 한 층 더 부각한 셈이다. 특히 하성광이 연기한 늙은 정영의 허무는 대극장에서 더욱 증폭됐다. 굽은 등, 바닥에 스미는 목소리, 무릎 꿇은 뒷모습 등 몸짓 하나하나가 거대한 무대 한가운데를 버티며 서사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낸다. 아들을 희생해야 하는 아비의 비통, 그리고 20년 만에 조씨고아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데뷔 30년차 배우의 공력이 폭발하며 극장에 감정의 파고(波高)를 일으켰다.
2015년 초연부터 국립극단에서 관객이 보고 싶은 작품 1위를 지켜오고 있는 고선웅 연출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배우 하성광이 조씨 가문 마지막 핏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갓난아기를 희생시키는 시골 의원 정영으로서 명연기를 펼친다. 국립극단 제공 진나라 왕 ‘영공’부터 성문지기까지 배역의 경중없이 모든 출연진이 뚜렷한 존재감있는 연기를 펼쳤다. 원작에 없으나 고선웅이 등장시켜 객석 곳곳에서 눈물이 나오게 만든 정영의 처 이지현 배우, 그리고 젊은이를 위해 여생을 미련없이 버리는 공손저구 정진각 연기가 묵직했다. 무엇보다 도완고 역을 맡은 장두이의 압도적 카리스마가 대극장 무대의 긴장감을 견인했다.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