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는 더 이상 건설·제조 현장의 추락·끼임 같은 ‘육체적 사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업군이 다양해지면서 과로·번아웃·스트레스성 질환 등 보이지 않는 형태의 산재가 빠르게 늘고 있다. 사고와 질병, 직업병과 작업 관련성 질환이 뒤섞인 요즘의 노동환경에서 기존의 사고 중심 예방체계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함승헌 가천대 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국내 산업재해 개념이 제조업 시대에 머물러 있다면서 산재 예방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의 업무 형태 파악과 정서 상황 고려 등 새로운 모델 마련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가천대 길병원 제공 함승헌 가천대 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현대의 산재는 노동의 강도·속도·정서적 부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문제”라며 산업재해 개념을 재정의하고 대응체계를 재구성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과로사와 업무 관련 질환에 대한 보상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발병 전 일정 기간의 ‘평균 노동시간’ 같은 단순 지표에 의존하는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의 실제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는 시간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작업강도·작업환경 등 다양한 요인을 종합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게 함 교수의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 그는 최근 노동자·직장인들의 과로·번아웃·스트레스성 질환 증가의 핵심 요인으로 ‘노동의 고밀도화’와 ‘연결성의 증가’를 꼽았다. 함 교수는 “예를 들어 감정노동, 사무·IT 업무 모두 짧은 시간 안에 높은 집중도와 감정 노동을 요구한다”며 “게다가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겪는 ‘스마트폰으로 업무가 끊기지 않는 환경’이 번아웃을 가속한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노동자 스스로도 내 몸의 과로 신호를 잘 듣고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함승헌 교수는 “수면 부족, 불규칙한 식사, 활동량 감소 등 생활습관 요인도 스트레스 취약성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라며 “기업과 제도의 변화가 매우 중요하지만 노동자 스스로도 ‘내 몸의 신호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부분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현재는 사고가 난 뒤에야 대응하는 ‘사후약방문식 접근’이 강하다”며 산업보건의 기본은 예방임을 재차 지적했다. 예방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정부·기업뿐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의 건강 상태와 초기 신호를 인지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산재 정책, 공간→직무 중심으로 전환해야
최근에는 기존 제조업 중심의 안전정책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예컨대 현행 과로 기준으로 자주 언급되는 ‘주 60시간 근무’라는 지표도 시대 변화에 맞게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는 “주 60시간 기준은 육체 노동 시대의 기준이라고 봐야 한다”며 “지금은 정신적 피로, 감정노동, 집중도의 지속 시간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됐다. 변화에 맞춘 다차원적 기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안전보건정책은 이제 ‘어디서 일하는가’뿐 아니라 ‘어떤 일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중심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신·정서적 소진에는 ‘흐린 눈’… 문화적 장벽 커
과거에 비해 산업현장에서 정신·정서적 소진을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감정노동 ▲직장내 괴롭힘 ▲성과압박 등이 여전히 산재에서는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취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함 교수는 현실적으로 정신·정서적 부담은 수치화가 어렵고 업무 기인성 판단도 까다롭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사업주와 노동자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문화가 필요한데 이 부분이 부족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사업주는 노동자의 감정노동 정도가 심해지는지, 직장 괴롭힘 등을 겪고 있는지를 모두 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이와 동시에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에너지 상태를 스스로 파악하고 적절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도 조성돼야 한다. 기업의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어도 노동자가 편안하게 이용할 수 없는 분위기라면 효과가 감소될 것”이라고 봤다.
실제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내부 공용 폴더에 사내 상담센터 이용 기록이 ‘징계 폴더’에 포함돼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당시 회사는 상담 이용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노동조합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 다만 이를 본 직장인들은 여전히 감정·정신적 스트레스를 회사에 알리면 불리해질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과로·번아웃형 산재 줄이려면… 심리·정서적 요인 위험성평가에 포함해야”
과로사·번아웃·정신질환형 산재를 줄이기 위해 정부의 향후 과제는 무엇일까. 함 교수는 심리·정서적 요인을 위험성평가에 공식 포함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짚었다.
기업 차원에서 적용 가능한 예방·관리 모델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사업주는 중간관리자 교육을 강화하고, 실효성 있는 EAP(근로자지원프로그램)를 제공하며 직무 스트레스를 사전에 평가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노동자도 자신의 건강 데이터를 기록하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규칙적인 수면·식사·활동량을 유지하고, 과도한 근무 상황에서 자신의 피로 신호를 인지해 보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 스트레스가 늘어나면 상담이나 EAP를 적극 활용하고 디지털 과사용을 조절하며 회복 시간을 확보하는 생활습관을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함 교수는 “산업재해 예방은 정부·기업·노동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구조여야 한다”며 “함께 건강을 관리할 때 비로소 실질적인 예방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