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울산 미포만. 백사장 위에 골조만 겨우 세워진 조선소에서 첫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가 물 위로 나왔다. 조선소 완공 전부터 공사와 생산을 동시에 진행한 유례 없는 산업현장이었다. 당시 기술자들은 바람이 불면 모래가 휘날리는 현장에서 절단과 용접을 반복했다. 장비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빈손으로 서 있던 날도 많았다. 그런데도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정주영 HD현대 창업주가 500원짜리 지폐와 미포만 사진 한 장을 들고 해외 선주들을 설득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51년 후 HD현대가 세계 최초로 5000척 인도라는 또 다른 신화를 만들었다. 당시 해외 기술자들은 "한국엔 조선 인프라가 없다"고 말했고, 일본 해운사들은 "한국은 5만t급만 건조하면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26만t급 대형 유조선 수주가 이뤄졌고, 미완의 조선소에서 배부터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지금 같은 공정관리 체계였다면 불가능한 방식"이라며 "어떻게든 건조해내겠다는 일념하에서 그 시절 한국 기술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회고했다.
HD현대는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식'을 열었다. 정기선 회장은 "선박 5000척은 대한민국 조선 산업의 자부심이자 세계 해양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도전의 역사였다"며 "다음 5000척과 또 다른 반세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5000척은 숫자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불황과 호황 사이클을 넘나드는 생사의 기로에서 회사가 선택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백사장에서 골조를 세우던 초기 현장부터 울산함 진동 문제를 잡기 위해 밤새 설비를 옮기던 시기, 대형선 불황을 중형선이 메워준 구조, 협력사가 버티기 위해 지역 전체가 움직이던 순간까지 모두가 누적돼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국내 첫 전투함 '울산함' 건조 과정은 50년 역사가 한꺼번에 담겨있다고 한다. 설계부터 장비 배치까지 '처음 해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진동 시험에서는 선체 내부가 예상보다 크게 흔들리자 도면을 다시 고쳤고, 통신·음탐 장비는 실제 야전에서 쓰던 장비를 공장 안으로 가져와 배 안에서 바로 배치해보며 위치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쌓인 경험은 울산급 추가 9척,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인천급 호위함에 이르기까지 기술 계보를 만드는 기반이 됐다. 이번 5000번째 인도함이 필리핀 초계함이라는 점도 이런 계보를 자연스럽게 잇는 사례다.
이 시기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생산 방식에서도 또렷했다. 당시 조선업 최강국이었던 일본은 '표준 모델'을 만들어 선주에게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비용 절감과 생산 안정성은 있었지만 수요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한국은 정반대였다. 선주 요구가 바뀌면 설계도 처음부터 다시 쓰는 방식이었다. HD현대 임원은 "일본이 기성복이라면 한국은 맞춤복이었다"고 말했다. 바로 이 차이가 1990년대 이후 기술 역전으로 이어졌다.
조선업 생태계가 버틴 것도 5000척 달성의 중요한 배경이다. 선박 한 척의 70%는 협력사가 만든다. 용접·배관·의장·전장 등 대부분의 공정이 협력사 몫이다. 불황기마다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도 협력사다. 울산 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협력사가 무너지면 라인은 바로 멈춘다. 도크가 멀쩡해도 배가 안 나온다"고 말했다. 울산 북구를 지역구로 둔 윤종오 의원은 "5000척이라는 대기록은 협력사, 지역 노동자, 울산 주민까지 포함한 세대의 기록"이라고 했다. HD현대가 사장 직속 동반성장 조직을 만들고, 인력·교육·품질 지원을 대기업이 직접 떠안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숙련공 축적 역시 중요한 축이다. 최근 부자(父子) 명장이 나온 사례가 상징적이다. 액화천연가스(LNG) 연료탱크 용접, 고압 배관, 전장 작업은 여전히 사람이 좌우한다. 자동화가 늘었지만 고난도 핵심 공정은 숙련공의 손이 필요하다. 지난 9월 HD현대중공업 소속 고민철 기사가 판금제관 직종에서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고 기사는 HD현대중공업에서 근무했던 제관 직종 명장 고윤열씨의 아들로, 조선업 분야 최초의 부자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 같은 고급 인력 누적이 국내 조선 품질을 떠받친 기반으로 분석된다.
오지은 기자 j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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